헤드 랜턴이 꺼졌다. 남은 장작 6개비마저 다 타버리면 모든 불이 꺼진다. 지하 190m 갱도 아래 갇힌 지 열흘째, 이제 암흑이 몰려오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 눈물만 흘렀다. ‘띠-띠-띠-’. 지상과 연결된 인터폰이 마침내 울렸다.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악몽이었다.
지난해 10월 경북 봉화군 한 아연광산에서 매몰됐다가 221시간 만에 구조된 광부 박정하(63)씨는 2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지난 1년을 트라우마에 속에서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오는 4일은 박씨가 구조돼 나온 지 꼭 1년 되는 날이다.
지난해 온 국민이 이태원 참사로 슬픔에 잠겨 있던 때, 박씨의 생존 소식은 ‘기적의 생환’이라 불리며 큰 희망을 줬다. 하지만 1년이 지난 현재 박씨는 어두운 곳에 있으면 가슴이 뛰는 등 불안 증세가 나타난다고 한다. 일주일에 1~2차례 악몽을 꾸는 것은 물론 잠이 들어도 3시간 이상 푹 자지 못한다. 그는 1~2주마다 한 차례씩 근로복지공단 태백병원에 다니며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악몽을 꾸면서 몸부림을 쳐 벽을 얼마나 세게 쳤는지 발톱이 빠질 정도였어요. 저희가 구조되기 몇 시간 전에 헤드 랜턴이 모두 꺼졌는데, 그때의 공포와 두려움이 아직도 생생해요. 인터폰이 울리기만을 간절히 바랐는데, 결국 울리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 인터폰 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요.”
악몽과 환청에 시달리는 박씨는 매일 정신과 약을 먹어야 한다. “약을 오래 먹다 보니 머리가 맑지 못한 느낌이 들어요. 머리에 꼭 무거운 것을 이고 있는 것 같고, 무기력해지기도 해요.”
하지만 그는 지난 1년 동안 언론 인터뷰 요청을 마다치 않고 적극적으로 응했다. 병원에서는 당시 상황을 끊임없이 복기하는 것이 트라우마 극복에 도움되지 않는다며 인터뷰를 자제하라고 했지만, 박씨는 멈출 수 없었다. 지난해 11월 안동병원에서 퇴원할 당시 기자회견에서 “앞으로 동료들이 일하는 작업 환경 개선을 위해 일하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당시 저희를 구조하려고 가장 애쓴 사람이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었어요. 그들은 지금 이 시각에도 어두운 갱 속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론을 통해 동료들이 일하는 현실을 알리고, 개선해달라고 호소하려고 인터뷰에 모두 응하고 있습니다.”
박씨의 이런 간절함은 정부 정책에도 반영됐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2월 봉화 광산 사고를 계기로 비슷한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광산안전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이 대책에는 갱도 안 장거리 광역통신장비 보급, 갱도 밖 재해예방 시설·장비 보급, 광산 자체 구호대 표준 매뉴얼 보급, 생존박스 등 대피시설 설치 의무화 등이 포함됐다. 광산 안전시설 지원 예산도 지난해 64억원보다 72% 늘어난 110억원이 책정됐다.
갱도 안에 대피시설 역할을 하는 생존박스를 설치하는 것은 박씨가 제안한 아이디어였다. “갱도 안은 ‘막장’이라 부를 만큼 위험한 곳이지만, 그 안에서도 안전한 곳이 있어요. 그곳에 생존박스를 만들고 구호물품을 구비해두면, 또다시 갱도가 무너지는 사고가 생겼을 때 동료들은 나보다 더 안전한 환경에서 구조를 기다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산업부는 지난 9월 강원도 삼척시 한 석회석광산 갱도에 생존박스를 처음 설치했다. 생존박스는 6명이 72시간 이상 머무를 수 있는 규모로, 유해가스 차단 장비, 산소 공급 장치, 응급 구호물품 등이 구비돼 있다. 박씨가 동료와 함께 열흘 동안 버틸 수 있게 해준 커피믹스 등 고열량 음식도 포함됐다. 산업부는 오는 2027년까지 5명 이상 광산 83곳에 생존박스를 설치할 계획이다.
갱도 안에 대피시설 역할을 하는 생존박스를 설치하는 것은 박씨가 제안한 아이디어였다. “갱도 안은 ‘막장’이라 부를 만큼 위험한 곳이지만, 그 안에서도 안전한 곳이 있어요. 그곳에 생존박스를 만들고 구호물품을 구비해두면, 또다시 갱도가 무너지는 사고가 생겼을 때 동료들은 나보다 더 안전한 환경에서 구조를 기다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산업부는 지난 9월 강원도 삼척시 한 석회석광산 갱도에 생존박스를 처음 설치했다. 생존박스는 6명이 72시간 이상 머무를 수 있는 규모로, 유해가스 차단 장비, 산소 공급 장치, 응급 구호물품 등이 구비돼 있다. 박씨가 동료와 함께 열흘 동안 버틸 수 있게 해준 커피믹스 등 고열량 음식도 포함됐다. 산업부는 오는 2027년까지 5명 이상 광산 83곳에 생존박스를 설치할 계획이다.
박씨는 광산안전도를 현재에 맞게 갱신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제가 구조되고 난 뒤에 현장에 가서 구조당국이 시추한 곳들을 보고 놀랐어요. 그 많은 장비가 와서 모두 엉뚱한 곳을 뚫었더라고요.” 지난해 구조당국은 박씨가 대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 12곳을 지상에서 수직으로 뚫는 시추 작업을 했다. 하지만 업체 쪽이 가진 광산안전도는 20여년 전에 만들어져 이를 토대로 한 시추는 실패했다. 산업부 쪽에서 현장에서 다시 실측해 시추에 나섰지만, 실제로 매몰자가 발견된 곳과는 거리가 멀었다.
박씨는 “규모가 큰 광산은 갱내 도면을 건축 도면처럼 복도, 화장실까지 정확하게 표시하는데, 이 회사는 주먹구구식으로 도면을 만들었어요. 관리·감독 기관에서 주기적으로 관리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사업주 입장에서는 (안전보다) 생산에만 열을 올려요. 결국 안전사고에 취약할 수밖에 없어요”라고 꼬집었다.
매몰 사고 관련 수사도 마무리 단계다. 경북경찰청은 지난달 31일 아연광산에서 매몰 사고를 낸 원청업체 대표 ㄱ씨 등 5명을 업무상 과실치상 혐의로 대구지검 안동지청에 불구속 송치했다. 산업통상자원부 동부광산안전사무소도 지난 5월 이들을 광산안전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대구노동청은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수사 중이다.
“1년이 지나서야 하나둘씩 마무리되네요. 앞으로 검찰 판단을 지켜봐야겠지요. 저는 갱도 밖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할 예정입니다. 병원 가는 길에 항상 동부광산안전사무소를 들릅니다. 동료들이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박씨가 힘주어 말했다.
한겨레 김규현 기자 / gyuhy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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