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 “돈 잔치, 종노릇, 갑질” 날선 발언
인·허가권 쥐고선 시장 탓 ‘어불성설’
가계 빚 잡으라며 금리 낮춰라 ‘모순’
‘악덕 기업’ 공격으로 민간 압박 논란
은행권이 마녀사냥에 휩싸였다. 높아진 금리에 모두가 고통 받고 있는데 혼자만 배를 불리고 있다는 공격이다. 정부를 넘어 대통령이 선두에 서면서 공세는 더 매서워지고 있다. 공교롭게도 선거가 반년도 남지 않은 시점이다. 상대적 박탈감을 자극하는 논리는 늘 그랬듯 매력적이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은행에게 고금리는 기회이자 리스크다. 이익이 불어나는 만큼 위험 관리 비용을 짊어지게 된다. 은행을 둘러싼 비난의 이면에 놓여 있는 불편한 진실을 팩트체크해 본다. <편집자주>
윤석열 대통령이 연일 은행권을 향해 돈 잔치, 종노릇, 갑질 등 날선 발언을 이어가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정부가 인·허가권을 쥐고 업체 수를 조정하는 은행권을 두고 독과점이라 몰아붙이고, 가계 빚을 잡아야 한다며 엄포를 놓으면서 대출 금리를 낮추라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한 압박에 못 이긴 금융그룹들이 잇따라 상생 방안을 내놓는 가운데, 정부가 악덕 기업 이미지를 은행에 덧씌워 정책 차원에서 이뤄져야 할 서민 지원 부담을 민간에 떠넘기고 있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7일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 달 말 윤 대통령의 종노릇 발언을 두고 은행권에서는 상생금융의 시즌 2를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 나왔다. 지난 2월 윤 대통령의 돈 잔치 발언이 나온 직후에도 은행권은 3년 간 10조원을 공급하는 상생금융 강화방안을 내놓은 바 있다.
윤 대통령은 지난 달 30일 국무회의에서 참모진이 최근 민생 현장을 찾아 청취한 내용을 소개하며 “고금리로 어려운 소상공인·자영업자들은 ‘일해서 번 돈을 고스란히 대출 원리금 상환에 갖다 바치는 현실에 마치 은행의 종노릇을 하는 것 같다’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고 전했다.
이어 윤 대통령은 지난 1일 서울 마포구에 있는 한 북 카페에서 주재한 21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우리나라 은행들은 일종의 독과점이기 때문에 갑질을 많이 한다”며 “우리나라 은행의 이런 독과점 시스템을 어떤 식으로든지 경쟁이 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답정너' 카르텔
대통령의 비난 섞인 언급을 은행권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납득하기 어려운 구석이 많다. 특히 가장 최근에 나온 독과점 발언은 현재의 금융 규제 체계로 놓고 봤을 때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지적일 수 있다.
이는 국내에서 은행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라이선스를 내주는 권한을 전적으로 정부가 갖고 있어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은행 숫자를 늘리고 줄여 온 게 정부인데, 이제 와서 몇몇 대형 시중은행들이 카르텔을 짜고 독과점을 조장해 왔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건 억지란 얘기다.
실제 시장의 현실을 봐도 독과점을 논하기엔 무리가 있는 상황이다. 우선 제1금융권에 속해 있는 은행만 해도 20개나 된다. 유형별로는 ▲시중은행 6개 ▲지방은행 6개 ▲특수은행 5개 ▲인터넷전문은행 3개 등이다.
몇몇 대형 시중은행의 영향력이 너무 강하다는 공격도 냉정하게 따져 봐야 한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은행 등 4대 은행의 자산 기준 시장 점유율은 올해 상반기 말 기준 총 52.7%로 절반을 약간 넘는 수준이다. 각 은행별로는 ▲국민은행 14.1% ▲하나은행 13.4% ▲신한은행 13.3% ▲우리은행 11.9% 순이다.
◆소비자는 '볼모'
정부가 가계 빚을 염려하면서 고금리를 질타하는 방식 역시 찬찬히 따져 보면 어불성설인 측면이 있다. 가계대출 수요를 억제하라고 요청하면서, 소비자를 볼모로 삼아 금리를 올리지 말라는 건 억지에 가깝기 때문이다.
국민·신한·하나·우리·농협은행 등 5대 은행의 지난 달 말 기준 가계대출은 686조119억원으로 한 달 만에 3조6825억원 늘었다. 가계대출 잔액은 올해 5월부터 증가세로 전환한 뒤 반년 째 매달 증가폭을 키우고 있다.
은행들이 이처럼 불어나는 대출을 진정시키기 위해 쓸 수 있는 카드는 사실 금리 인상뿐이다. 가격을 올려 수요를 위축시키는 시장 원리다. 만약 고객이 제대로 요건을 갖춰 창구를 찾았는데도 은행들이 대출을 거부하기 시작하면 더 큰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아울러 대출 금리가 고공행진을 벌인 가장 큰 이유는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긴축과 그에 따른 기준금리 인상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은행권이 꼭 폭리를 취하려고 대출 이자율을 끌어올린 건 아니란 뜻이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4월부터 올해 1월까지 사상 처음으로 일곱 차례 연속 기준금리를 인상했다. 이중 7월과 10월은 기준금리를 한 번에 0.5%포인트(p) 올리는 빅스텝을 단행했다. 이에 따른 현재 한은 기준금리는 3.50%로, 2008년 11월의 4.00% 이후 최고치다.
◆포퓰리즘 '사냥'
정부 입장에 불만을 드러낼 법도 하지만 시중은행을 보유한 금융그룹들은 또 다시 상생안 마련에 분주한 분위기다. 괜히 반발하는 모습을 내비쳤다간 괘씸죄에 걸려 어떤 홍역을 치르게 될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깔려 있다.
자세한 은행권 상생 패키지나 사회공헌 프로그램은 오는 16일로 예정된 금융당국과 금융그룹 회장단 간담회에서 공개될 가능성이 크다. 이를 앞두고 금융그룹들은 구체적인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앞서 은행을 비롯한 보증기금과 한국주택금융공사 등 은행연합회 소속 20여개 회원기관은 새희망홀씨대출 등 금융소외계층 대출 등 금융지원과는 별개로 ▲2019년 1조1059억원 ▲2020년 1조929억원 ▲2021년 1조617억원 ▲2022년 1조2380억원 등 최근 해마다 1조원 이상을 사회공헌사업에 썼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인위적인 개입 대신 정책적인 대안을 내놔야 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올해 은행권의 대출 금리 상승과 이자 마진 확대는 통화정책 긴축의 결과로 봐야 한다”며 “정부가 임의로 금리 조절을 강제하면 시장 원리에 따른 이자율 연동 체계에 모순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금융권 관계자는 “정부가 소비자를 앞세워 은행을 악덕으로 몰아가는 건 포퓰리즘을 통한 기업 사냥”이라며 “정말로 서민에 대한 금융지원이 시급하다면 민간에 대한 실력 행사보다는 관련 예산을 적극 확대해 정책적 해결 의지를 보여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