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우정에서 띄우는 편지 (13)
조연환 제25대 산림청장의 17년째 귀촌 이야기
김장을 했다.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입동(立冬)인데도 아직 된서리도 내리지 않았다. 텃밭에 무 배추 쑥갓, 대파, 골파가 자라고 꽃밭에는 달리아, 봉선화, 파초, 맨드라미, 장미, 국화, 메리골드가 계절을 잊고 피어 있다.
김장하기에는 좀 이른 것 아니냐고 하니 그래도 지금 김장을 해야 한다고 한다. 녹우정 모든 일의 결정권은 아내에게 있다. 씨를 뿌리는 것도, 꽃을 심는 것도, 곡식을 거두는 것도 아내가 결정한다. 머슴은 아내가 하는 대로 따라 하면 된다.
더구나 김장을 하는 일이야 머슴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 녹우정에서는 매년 김장을 담는다. 결혼하고 54년 동안 김장을 안 담은 해가 없는 것 같다. 김장이야말로 아내의 자존심이자 자랑인 듯하다.
녹우정 김장 배추. 3번 나누어 심어 크기가 제각각이지만 알차게 잘 자랐다. ⓒ조연환
8년 전쯤 일이다. 아내와 둘이서 김장을 했다. 마침 나는 몸살감기에 걸려 지쳐있는데 둘이서 김장을 하려니 정말로 힘들었다. 그해 김장 맛도 별로였다.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이제 우리 김장하지 말고 사 먹도록 합시다. 내가 전국의 맛 좋은 김장을 다 골고루 맛 보여 드리리다.”
아내는 꼼짝도 않았다. “그럼 절임배추라도 사다 김장을 담읍시다.” 그래도 아내는 대꾸도 않는다. “두 식구 사는데 꼭 매년 김장을 해야 하는 거예요?”
이 말에 드디어 아내가 폭발했다. “나 혼자 먹자고 김장하는 거예요. 당신 데리고 오는 손님이 얼마예요. 열흘이 멀다 하고 손님 데리고 오면서 그럼 김장 안 하고 그때마다 사다가 손님 접대할 거예요.”
머슴도 할 말이 없다. 사실 그동안 녹우정에 참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오죽하면 정육점 주인께서 “또 손님 오시느냐”며 웃으시곤 했다.
내가 아니면 아내를 아껴줄 사람이 없다. ⓒ조연환
아내가 희수(喜壽: 77세) 되면서 손님 치르는 걸 많이 힘들어한다. 나도 더 이상 손님을 부르지 않기로 했다. 스스로 찾아오는 손님이야 어쩔 수 없지만 웬만하면 밖에서 대접을 하려고 한다. 내가 아끼지 않으면 내 아내를 누가 아껴 주랴.
김장을 하기 위해 녹우정 텃밭농사를 짓는 것 같다. 올 녹우정 텃밭농사 풍년이다. 고추 180포기 심어 태양초 70근 이상 했다. 30근은 김장용으로 쓰고 일부는 팔고 나머지는 아내가 여기저기 나눔을 하는 듯하다.
태양초 고춧가루 색깔이 고우니 올 김장은 맛날 것이라며 아내는 엄청 좋아한다. 마늘도 6 접을 캐 놓았다. 배추는 처음에 50포기 심었는데 배추벌레가 갉아먹고 두 번째 20포기 심어 농약을 잘못 쳐서 죽이고 세 번째 20포기 심었는데 늦게 심어 김장할 수 있으려나 했다.
그런데도 배추벌레가 먹고 남은 배추는 커다랗게 속이 꽉 찼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심은 배추는 김장하기 딱 알맞은 크기로 잘 자라 주었다. 올 녹우정 김장용 텃밭농사는 완벽하게 성공이다.
배추를 절이고 양념을 버무리는 과정에 아들, 손녀 이야기가 섞이면 신이 난다. ⓒ조연환
녹우정 김장을 하는 사람들은 매번 바뀐다. 3년 전에는 마을 가까이 사시는 사모님들께서 오셔서 함께 김장을 했다. 지지난해에는 누님과 두 여동생이 내려와서 2박 3일 묵으며 김장을 했다.
2박 3일 동안 김장을 하는지, 남편, 오빠 흉을 보는지 귀가 가려웠지만 그래도 마냥 행복했다. 지난해에는 친구 내외가 내려와 3박 4일 머물며 김장을 끝냈다. 올해는 정원 아카데미 여성 원우들이 내려와 김장을 하기로 했단다. 아들, 며느리도 하루 전에 내려와 김장 준비를 도왔다.
머슴은 마늘을 찧고 무 배추를 뽑아 옮기고 대파와 골파를 다듬었다. 새우와 오징어를 썰어 다지고 음나무, 오갈피, 소나무 가지를 잘라 수육 삶을 준비를 했다. 녹우정 김장하는 날, 일기예보는 비가 많이 내리고 날씨가 추워질 거라고 했는데 비도 내리지 않고 날씨도 푸근하다.
음나무, 오갈피, 소나무 가지를 잘라 수육을 삶았다. 푹 삶은 수육이 맛있어 보였다. ⓒ조연환
아내는 새벽부터 바쁘다. 아내 옆에서 배추를 절이고 무를 다듬고 김장 버무릴 준비를 돕는다. 아침밥을 먹으니 정원 아카데미 여성 원우들이 오신다. 참 반갑다. 김장은 아무래도 여럿이 어울려 담아야 제맛이 나는 것 같다.
여럿이 빙 둘러앉아 남편 흉도 한 숟가락 넣고 아들 자랑도 두어 국자 퍼 담고 손녀 자랑 마구마구 섞어 버무려야 김장맛이 나는 거 아니겠는가. 그러고 보니 녹우정 김장 맛은 머슴 흉 맛인가 보다.
머슴은 오늘 금산 포럼이 있는 날이다. 3년 전에 금산을 보다 아름답고 잘 사는 마을로 만들 수는 없을까 히는 마음으로 100여 명이 모여 금산 포럼을 발족했다. 지난 3년간 쉼 없이 매 홀수 달 첫째 토요일에는 포럼을 열고 짝수 달 첫째 토요일에는 둘레길 걷기 행사를 하고 있다.
오늘은 15번째 포럼이 있는 날이다. 포럼 이사장 직을 맡고 있으니 안 나갈 수 없다. 더구나 서울에서 오시는 강사님을 맞아야 하고 포럼 끝난 후에는 군수님께서 포럼 임원들과 강사님을 모시고 저녁을 함께 하기로 했으니 저녁까지 먹고 강사님을 서울행 버스에 태워 드린 다음 들어와야 한다.
김장을 하는 아내와 여성 원우들을 두고 나오려니 마음이 무겁다. 며느리가 “아버님! 어머님께 혼나지 않게 잘 하셔요” 하며 웃어 준다.
그래 쫓겨나지야 않겠지… 포럼을 진행하는 동안에도 김장은 잘 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음나무, 오갈피, 소나무 순에 된장, 소주까지 넣은 수육은 맛있게 잘 삶아지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올 김장맛은 어떨까? 김장하는 날 밖으로 나간 남편 흉을 엄청 볼 테니 틀림없이 김장 맛은 좋으리라….
포럼 행사가 끝나니 이미 김장이 끝나있었다. ⓒ조연환
금산 포럼 행사를 다 마치니 저녁 5시 반이다. 아내에게 전화하니 안 받는다. 며느리에게 전화하니 아직 김장이 다 안 끝났는데 자기는 애비하고 먼저 서울로 출발하고 손님들만 남아서 김장을 마무리 중이란다. “아버님, 쫓겨나지 않게 잘 하셔야 해요. 저희 집에도 빈 방이 없어요…” “그래, 알았다.”
집에 도착하니 녹우정에 훤히 불이 켜져있다. “아니, 어쩜 그리 김장 딱 끝내자 들어오셔요. 밖에서 지켜보다가 김장 끝나는 거 보고 오시는 거예요.“ 아내의 한마디에 살얼음이 끼었다.
”수옥쌤, 애자쌤 너무 고생했어요. 미안해서 어쩌죠…“ 얼렁뚱땅 인사를 하고 모닥불을 피운다. 차가워지는 밤에 모닥불이 타오른다. 모닥불에 아내의 화도 타 버리겠지. 더구나 아내는 무 채를 썰다가 손가락까지 다쳤다. 이를 어쩐담…
차가워진 밤에 모닥불이 타오른다. ⓒ조연환
온종일 김장하느라고 수고한 아내와 수옥 쌤, 애자 쌤이 모닥불 앞으로 모인다. 아내가 김장 버무린 배추와 수육을 담아 내온다. 맛나다. 정말 맛나다. 색깔도 참 곱다. 여느 해 보다 머슴 흉이 듬뿍 들어 갔나 보다.
올해 녹우정 김장 농사 대풍이다. 녹우정 김장 맛도 일품이다. 김장김치를 먹으며 생각한다, 이 맛이 도대체 어디서 나는 걸까?
무 배추 대파 골파 쑥갓 등 별맛없는 채소에 고춧가루 젓갈 마늘 생강 새우 오징어 등 고약하고 매섭고 비린 양념을 넣어 버무렸는데 어찌 이 달콤하고 맵고 짜고 상큼한 김장 맛이 날 수 있단 말인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고 개성도 맛도 냄새도 각각 다른 재료를 섞어 버무려 김장김치 맛을 내는 아내야말로 인재(人材)를 골고루 쓸 줄 아는 지도자 아닌가.
아내를 대통령으로 보내야겠다. 내 편 네 편 구분하지 말고, 영남도 호남도 가르지 말고, 좋고 싫음도 따지지 말고 짠맛 매운맛이라고 멀리하지 말고 한곳에 버무려 맛나는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땅의 정치인들이 김장김치의 비법을 깨달으면 참 좋겠다. “여보! 당신을 대통령으로 보내고 싶소”
P.S. 이 말은 김장하는 날 온종일 밖에 나갔다 왔다고 쫓겨날까 봐 두러워서 하는 아부가 아님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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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 조연환
- 출판
- 뜨란
- 발매
- 2018.05.20.
▼ 조연환 전 산림청장의 ‘녹우정에서 띄우는 편지’연재▼
12. 늦가을 마당은 꽃들의 경연장···그래, 꽃처럼 살자
https://blog.naver.com/nong-up/223250312896
글 = 조연환(전 산림청장)
정리 = 더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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