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생각하면 부담스럽고, 실제 병도 있어 역할을 맡는 데 상당히 주저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해보고 싶은 작품이었는데 기회가 없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데, 놓치면 평생 못한다는 생각에 과욕을 부렸다. 이 작품에 있는 힘을 다 토해 쏟아보겠다.”
연기 인생 62년, 배우 신구(87)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출연 소감을 묻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그와 함께 배우 경력 61년 차 박근형(83), 58년 차 박정자(81)가 입을 모아 ‘꼭 출연하고 싶던 작품’이라 고백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가 오는 12월 19일부터 내년 2월 18일까지 서울 중구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무대에 오른다. 9일 서울 종로구 예술가의 집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연기경력 도합 181년인 이들은 하염없이 ‘고도’를 기다리는 작품 속 두 방랑자 모습에 현재를 사는 우리의 모습을 투영했다고 말했다.
배우 박근형은 “모든 예술의 기본은 연극이고 무대인데, 무대를 사랑하는 학도들이 60년 전 내가 겪었던 것처럼 아직도 빈약한 생활을 하고 있다”며 “매년 한편씩 연극을 하겠다는 약속을 못 지키고 최근 7년에 한 번씩 연극을 해왔는데 이번에 운 좋게 얻어걸렸다. 베케트의 작품 같은 훌륭한 작품이 왜 우리에겐 없을까. K팝, K드라마 등이 세계적 수준으로 발돋움했듯 앞으로 우리나라 연극 창작물에서도 세계적인 작품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밝혔다.
연극계 대표 원로 배우들인 이들은 두 달간 캐스팅 변경 없이 단일 배역으로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인간의 육체적·탐욕적인 면을 상징하는 감정적 인물 에스트라공(고고)에 신구, 인간 지성을 상징하는 철학적 인물 ‘블라디미르(디디)’에 박근형, 포조의 짐꾼이자 노예인 ‘럭키’는 박정자가 맡았다.
배우 박정자는 “원작에서 남성 캐릭터인 럭키를 내가 맡으면 안 될까, 손을 번쩍 들었다”며 “이 작품을 거쳐 간 많은 배우와 그 무대를 바라보면서 늘 경이로웠는데, 꼭 출연하고 싶어 럭키 역 캐스팅에 스스로 나서게 됐다. 배우는 남녀 구별이 없다. 한 인간의 이야기를 할 뿐”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생전 베케트는 이 작품에 여성 배우가 출연하는 것을 반대했다지만) 제가 럭키를 맡았듯 신구 선생님이나 박근형 선생님이 여성 역할을 못 하겠나. 우리는 항상 자유롭다”고 덧붙였다.
포조 역에 캐스팅된 김학철(63)은 “64년 만에 드디어 연극계 막내가 돼 황홀하다. 포조 역을 맡게 된 것은 운명이고, 선생님들 캐스팅 소식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며 “대선배님들 사이에서 그 어느 때보다 긴장된 무대지만, 거침없이 연기할 것”이라고 소감을 전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1953년 파리에서 초연됐다. 극단 산울림의 임영웅 연출이 1969년 한국에서 처음 공연한 이래 50년간 약 1500회 무대에 오르며 관객의 큰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이번 공연은 연극 ‘라스트 세션’, ‘러브레터’ 를 선보인 오경택이 연출을 맡는다.
오경택 연출은 “워낙 전설적인 작품이고, 임영웅 연출의 훌륭한 프로덕션을 보며 연출을 배웠기에 부담을 느낀다”면서도 “선생님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연극은 배우의 예술인 만큼, 대본에 충실히 따르면 다른 느낌의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는 한편 나 스스로 선택한 행복한 고통을 즐기고 있다”고 강조했다.
“실재하지 않는 고도. 형태 없는 이 대상을 기다리며 무대에서 배우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그것이 신이든, 자유든, 희망이든 언제나 꽉 채워지지 않는다. 내일은 채워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사는 것은 그런 희망 때문이니까” 신구는 고도를 기다리는 의미에 대해 고민을 거듭했다고 전했다. 동료들은 그가 지난해 급성 심부전이 발병해 인공 심장박동기를 삽입한 상태로 걱정을 많이 했지만, 이번 작품을 놓치면 평생 못한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연습에 임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오는 12월 19일 개막해 내년 2월18일까지 공연된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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