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고금리와 고물가로 글로벌 경제에 연일 어두운 소식이 들려오는 가운데 유독 연이은 호재로 주목받고 있는 국가가 있습니다. 바로 일본입니다. 지난 6월에는 니케이225 지수가 무려 33년 만에 3만3000선에 도달한 데 이어 상장사들은 상반기 어닝서프라이즈를 기록하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버블 경제 붕괴 이후 일본 경제에 30년 만에 훈풍이 부는 배경에는 엔저가 원인으로 지목됩니다. 엔저에 따른 환차익으로 완성차 업계 등 일부 수출 기업들이 막대한 이익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엔저로 인한 경제 호황의 이면에는 큰 부작용도 존재합니다. 산업과 증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는 중소기업과 식품 관련 업계는 엔저로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엔저가 일본 사회 몰고 온 부정적인 측면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중소기업, 상반기 4000여곳 도산…전년 比 30% 증가
올해는 일본 중소기업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한해였습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국제 원자재 가격이 뛴 상황에서 엔화 가치까지 폭락하면서 자재 수입 비용이 급등했습니다.
엔화 약세와 고물가의 직격탄에 결국 도산을 맞이하는 기업도 늘었습니다. 도쿄 상공 리서치가 지난 7월 발표한 2023년 상반기 중소기업의 도산 건수는 전년 동기보다 30% 증가한 4042건을 기록했습니다. 반기 기준 도산 건수가 4000 건대를 기록한 것은 코로나19로 한창 경기가 어렵던 2020년 이후 3년만에 있는 일입니다. 특히 원자재 수입 비중이 높은 제조업과 건설업의 도산 건수는 전년동기 대비 각각 36%, 37%나 늘었다고 합니다.
낙농업과 식품 업계가 입은 충격도 만만치 않습니다. 일본의 경제매체인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국제 곡물 가격이 오른 상황에서 엔저까지 맞물리면서 가축 사룟값이 1.5배에서 최대 2배까지 뛰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에 목장 운영 비용의 50%를 사료 조달에 쓰던 낙농업계는 큰 시름에 빠졌습니다. 경영난에 시달리는 목장 주인들은 배달비라도 아끼려고 1시간씩 트럭을 몰고 가축들의 사료를 실어 나르고 있다 합니다. 낙농업계는 경영 악화를 타개하기 위해 지난해 원유 가격을 기존 120엔에서 140엔으로 올리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식품 제조업체들도 큰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기상이변으로 가뜩이나 식자재 값이 급등한 상황에서 엔저까지 맞물리면서 제조 비용을 감당할 여력이 줄어든 것입니다. 지난 9월에는 요코하마시에 있는 제과 위탁제조업체인 하마스즈가 파산 절차를 밟게 됐습니다. 제조 원가 상승했는데도 소매점들이 좀처럼 가격 인상에 나서지 않으면서 하마스즈는 극심한 자금난에 처하게 됐다고 합니다.
올봄부터 오렌지주스가 식료품 매장에서 돌연 자취를 감추는 현상도 나타났습니다. 오렌지의 최대생산지인 미국 남부 플로리다주가 2년 연속 허리케인 피해를 입으면서 오렌지 생산량이 급감한 것입니다. 이에 미국 뉴욕 ICE 상품거래소에서 거래되는 농축·냉동 오렌지주스 선물(FCOJ) 1월 인도분 가격은 지난 1일 장중 파운드 당 4.17달러를 기록하며 역대 최고치를 찍었습니다. 오렌지주스 선물이 장중 파운드 당 4달러를 넘어선 것은 처음 있는 일입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달러 대비 엔화 가치까지 지난 10월 말 150엔대까지 하락하면서 식품업체들이 감당해야 할 식재료 수입 비용은 대폭 증가했을 것으로 추산됩니다. 아사히 음료는 급등한 재룟값을 견디지못해 지난달 1.5ℓ 오렌지 주스 제품을 오는 12월부터 판매 중단하기로 했습니다.
베이커리 메뉴를 판매하는 카페들도 과일 수입 비용상승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일본의 민영방송 NHK는 최근 카페들이 설탕 시럽과 수입산 과일 가격 상승에도 손님이 떨어질 것을 우려를 해 가격을 올리지 못하면서 경영난을 호소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수출 기업, 시가총액 35% 차지…중소기업 가계 경제 영향도 무시 못 해
그렇다면 중소기업과 일부 업계는 엔저로 고통을 겪고 있는데 왜 일본 경제와 증시는 큰 타격 없이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요? 분명 토픽스 지수와 니케이225 지수는 33년 만에 최고치를 찍는 등 일본 증시에는 훈풍이 불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 이유는 일본 증시에 상장된 기업 가운데 수출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말 기준 최고 우량 대기업들로 구성된 도쿄증권거래소의 프라임 시장에서 3대 수출 섹터의 기업들이 차지하는 시가총액은 전체의 28%(190조엔)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여기서 3대 수출섹터란 자동차, 기계, 전자기기를 의미합니다. 화학과 철강 분야까지 포함할 경우 5개 분야의 시가 총액은 237조엔까지 불어납니다. 무려 시장의 35%를 차지하는 규모입니다.
올 상반기 수출 섹터 기업들은 연이은 호실적을 기록했습니다. 도요타자동차는 엔화 가치 하락으로 발생한 환차익만으로 2600억엔의 추가 이익을 거둬들였습니다. 반도체와 화학관련 기업들은 중국의 수요 침체로 타격을 입긴 했지만 상장사의 절반 정도가 실적이 개선되며 업황둔화에서도 선방했습니다. 중소기업들이 엔저로 도산할 동안 일본 증시는 시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수출기업들의 실적 증가로 고공행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중소 규모 소매기업들의 경영난을 작은 문제라고 치부할 수 는 없습니다. 비록 일본 산업과 증시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을지라도 일본 경제 전반에는 큰 영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엔저로 인해 증가한 수입 비용을 상품에 전가할 경우 일본의 도·소매품 물가가 뛸 수 있습니다. 현재 일본은 임금이 물가가 오르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실질임금이 18개월 연속 감소세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업들이 소비자들에게 비용 부담을 전가할 경우 가계 경제는 큰 타격을 입게될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은 국내총생산(GDP)에서 가계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50%나 되는 만큼, 가계 소비 타격은 나아가 국가 경제 성장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경제 구조를 보면 일본이 수출 대기업들의 경기 개선만으로 경제가 살아났다고 안심하기는 이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엔저로 인한 대기업의 어닝서프라이즈가 증시는 부양했을지 몰라도 가계 경제에는 긍정적인 효과를 주지 못한 것입니다. 저임금과 중소기업 도산 등 일본 경제가 떠안은 여러 문제들을 함께 고려해본다면 엔저는 일본에 득만큼이나 많은 실을 가져다 줄 것으로 보입니다.
이지은 기자 jelee0429@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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