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소비 부진이 장기화하고 있는 가운데 내국인의 해외 소비는 크게 늘어나고 있다. 엔데믹(감염병의 풍토병화) 이후 해외여행에 대한 ‘보복소비 심리’가 폭발했기 때문이다. 특히 엔저 현상이 이어지고 있어 한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해외여행지인 일본 여행에 대한 가격 메리트가 커진 영향이 크다.
9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내국인의 해외소비지출액은 12조3560억원이다. 해외소비지출액은 가계가 해외에서 의·식·주 및 교통수단 이용요금으로 사용한 금액을 뜻한다. 팬데믹 당시 정부가 얼어붙은 소비심리를 되살리기 위해 2020년 5~8월 전국민을 대상으로 지급한 1차 긴급재난지원금 규모(14조2000억원)와 맞먹는 금액이다.
이 가운데 상당 금액은 일본에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관광국(JNTO)에 따르면 올해 1~9월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은 489만4800명이다. 이 기간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 수는 총 1737만4300명으로, 이 가운데 한국인 비중이 28.2%로 1위를 차지했다.
일본은 거리가 가까워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해외 여행지로 꼽힌다. 최근에는 엔저현상까지 겹쳐 일본여행에 대한 수요가 폭발하고 있다. 이런 수요를 반영해 여행업계는 일본 소도시 상품 개발에 나서고 있다. 오사카, 후쿠오카, 삿포로, 도쿄 등 주요 관광지가 포화상태인데다, 한국인의 일본 재방문율이 높은 만큼 신규 여행지를 발굴해야하는 필요성이 높아져서다.
하나투어는 올해 동계시즌 시즈오카, 다카마쓰, 마쓰야마, 가고시마 등 일본 소도시 상품을 확대 운영할 예정이다. 모두투어는 에어서울, 티웨이항공과 협업해 요나고, 사가행 여행 상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교원투어는 일본 여행상품 담당부서에 업무량이 몰리는 상황을 고려해 전담인력을 추가 채용하고 있다.
일본 여행 경비에 대한 부담은 줄어든 가운데 한국 여행 경비 부담은 커진 것도 해외여행을 부추긴 요인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여름휴가 성수기였던 지난 8월 국내 콘도이용료와 호텔숙박료는 전년 동월 대비 각각 8.5%, 6.9% 올랐다. 이외에도 택시비(19.1%), 시외버스요금(10.2%), 시내버스요금(8.1%) 등 교통비도 올랐다.
국내 소비 대신 해외여행을 택하는 소비자의 성향은 올해 추석 황금연휴기간에도 나타났다. KB국민카드에 따르면 올해 추석 황금연휴기간(9월28일~10월9일) 해외 결제금액은 전주 동기간 대비 8.3% 증가했다. 반면 국내 소비금액은 3.0% 증가하는데 그쳤다.
정부가 내수 진작을 위해 임시공휴일까지 지정했지만 국내 소비보단 해외소비가 더 큰 폭으로 늘어난 것이다. 한 여행업계 관계자는 “전반적인 국내 물가 인상으로 ‘이 가격이면 해외여행을 가겠다’는 심리가 커졌다”며고 말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현재의 원·엔 환율은 소비자가 일본 재화나 서비스를 구매하는 데 매우 매력적”이라며 “상당히 이례적인 상황이기 때문에 소비자의 행태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해외여행 수요의 일부만 국내관광 수요로 돌려도 내수진작 효과가 상당할 것이란 의견이 나온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지난 4월 정부가 119만명의 내국인에게 여행비 일부를 지원하면 연간 6조500억원의 내국인 소비진작 효과를 낼 것이란 취지의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업계에선 성인 1인당 일본여행 경비로 100만~150만원을 지출하는 것을 고려하면, 올해 일본으로 떠난 한국인의 절반만 국내로 돌려도 3조원이 넘는 소비진작 효과가 있었을 것으로 예측했다.
이훈 한양대 관광학부 교수는 “여행을 떠나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은 경험에서 오는 만족도를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며 “이때문에 물가가 오르더라도 일상생활에서 지출을 줄이고 여행을 계획한다”고 말했따. 이어 “이들이 해외여행 대신 한국에서 소비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국내 관광 경쟁력 확보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이미경 기자 capita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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