큼지막한 태극기와 십자가 두 개, 그리고 이름 위 튀르키예어로 ‘코렐리'(한국인)라는 문구가 새겨진 낡은 묘비가 발견됐다. 이 묘비는 지금까지 튀르키예 한인사회에 알려지지 않았던 묘비다.
이번 발견을 계기로 주튀르키예한국대사관은 사실상 튀르키예 최초의 한국인 묘지로 추정되는 이 무덤에 매년 꽃을 들고 찾아가 고인을 추모하기로 했다.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이원익 주튀르키예 한국대사는 주튀르키예 폴란드 대사로부터 “지금 방금 찾은 건데요”라는 짤막한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주 튀르키예 폴란드 대사는 문자 메시지와 한 장의 사진도 함께 전송했다. 사진은 폴란드 대사가 앙카라 한복판 공원묘지에서 산책하다 우연히 찍게 된 것이다.
묘비에는 태극기와 십자가 두 개, ‘코렐리'(한국인)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묘비에 새겨진 바에 따르면, 1963년 태어난 고인은 1965년 세상을 떠났다. 만 두 살 생일을 불과 열이틀 앞두고 세상은 뜬 것이다.
대사관은 고인이 누군지 정확히 알아보고자 묘지관리소를 통해 매장 시기 등 간단한 자료를 추가를 요청했다. 하지만 충분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연고를 도통 파악하기 어려웠다. 영영 수수께끼로 남을 듯했지만, 우연히 이 대사를 찾아온 이들이 기억을 더듬어 한조각씩 이야기를 전해줬다. 이를 토대로 대사관은 고인이 누군지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다.
1964년 튀르키예 부임한 국방무관의 갓난 아들로 추정
고인은 1964년 현지 한국대사관에 부임했던 국방무관(외교공관에서 주재관으로 근무하는 군 장교) 백모 씨의 아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백씨는 갓 태어난 아이와 함께 이역만리 타국에 와 교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척박한 환경에서 외교관의 역할에 충실했다. 하지만 불과 1년 만에 불의의 사고로 아들을 잃게 됐고, 몇 년 뒤 임기를 마치게 된 백씨는 아이를 이곳에 묻은 채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정확히 어떤 사연으로 고인이 이곳에 묻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당시만 해도 서울에서 튀르키예 앙카라로 가는 직항은 없었고 대만과 싱가포르, 아랍에미리트(UAE) 등을 거쳐 3∼4번은 비행기를 갈아타야만 했다.
더욱이 이슬람 문화는 영혼의 안식처가 소멸한다며 화장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에 시신이 든 관을 운반하기가 물리적으로도, 절차적으로도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이곳에 고인을 묻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7년 수교한 튀르키예는 대한민국의 10번째 수교국이다. 튀르키예 한인 이민사가 시작됐다는 1970년대보다도 앞선 시기인 고인의 묘소는 험난했던 초반 대한민국 외교사를 나타내는 증거다
주튀르키예한국대사관은 사실상 튀르키예 최초의 한국인 묘지로 추정되는 이 무덤에 매년 꽃을 들고 찾아가 고인을 추모하기로 했다.
이 대사는 12일 “알아보니 고인의 부친도 작년 작고했다고 한다”며 “이제 두 분이 두 살과 젊은 아빠의 모습으로 하늘나라에서 반갑게 만나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방제일 기자 zeilis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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