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성시대 거창
이리역 폭발사고
1977년 11월 11일
(사건 발생 46주년)
59명 사망
1,158명 부상
약 10,000명의 이재민 발생
시작부터 끝까지
인재(人災)의 표본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사건
이리역 (현 익산역)은
군산선과 호남선, 전라선이 한데 만나는
호남지역의 교통 중심지로
수도권에서 전라도로 가려면
꼭 들려야 했던 익산역에
호송원 단 한 명과 함께
다이너마이트 40톤을 싣고 달리던
광주행 한국화약 화물열차가 정지하게 된다
문제는 당시 철도청의 비리가
너무 만연했다는 점인데
당시 익산역의 역무원은
급행료라 부르는 뇌물을
호송원에게 요구했으며
호송원이 이를 거부하자
역무원들은 화약을 실은 열차를
이리역 구내에 40시간동안 정차시킨다
“나 터질게?”
문제라면 화약류와 같은
폭발 위험물을 취급하는 열차는
화물열차임에도 철도법 상
무정차 통과시켜야 하는데
이리역의 역무원들은
이런 점을 깡그리 무시한 것이었고
“쒸,,,뿔것,들,,,,”
이런 상황에 화가 난 호송원은
근무중임에도 불구하고
역전 술집에서 술을 진탕 퍼마신 후
11월의 맹추위에 추운 나머지
화약이 가득 찬 화차에 기어들어가
촛불을 켜고 잠자리에 들었다
+) 이것에 대한 의견 하나 추가
근무시간에 음주는 좀 억까같네
언제 보낼지 몰라서 잠도 숙소같은데 못가고
창고칸에서 쪽잠 잔거같은데
근데 또 한겨울에 존나 추워서 촛불이라도 켠거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화물열차는 ‘화약’ 운반열차다
그렇게 술을 퍼먹은 호송원이
화차 구석에서 개꿀잠을 자던 중
양초가 넘어져 옆 상자에 불이 붙었고
매캐한 냄새가 나서 일어난 호송원은
눈 앞에 일어난 일에 패닉이 와
급히 덮고 있던 침낭으로 불을 끄려 했지만
오히려 불은 더 크게 번지기 시작했고
호송원은 그대로 도망쳐버렸다
화약을 가득 실었음에도 불구하고
열차 내부에
소화기는 없었고
그렇게 불이 번지기 시작한 모습을 본
철도청 직원들마저 모두 도망가버렸으며
급히 검수원 7명이 달려와
화약열차임을 확인하고 경악하며
불을 끄려 했지만
결국 화약에 그대로 불이 붙으면서
‘쾅!!’
대폭발을 일으키며
이리역과 인근 시내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버렸다
500m 내에 있던
이리역과 인근 시내는
말 그대로 박살이 났으며
당시 이리 시민들은
북한군의 폭격이 떨어졌다 생각해
도시는 난리가 났다
이리역 폭발사고는
말 그대로 인재(人災)의 표본이었는데
일단 화약을 운반하는 과정에서
뇌관과 폭약이 같이 붙어있었고
담당자 없이 호송원 한 명 만이
화물을 관리해야 했으며
문제는 그런 호송원조차
근무시간에 음주를 했고
화약 옆에서
화기를 다루었으며
화약을 다루는 열차 내부에
화재를 진압할 소화기조차 없었고
이런 열차를 돈 몇 푼 안줬다고
보내지 않고 구내에 쳐박아두기까지 했다
하춘화 이주일도 공연중이어서 죽을뻔했던 사고
46년이 지난 지금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버린 대참사인
이리역 폭발사고
11월 11일, 한번 기억하고 지나가보는건 어떨까?
+)
이리역에 대한 게시글 하나 있길래 추가!
이리역 폭발 사고는 누구 잘못이 가장 클까
https://m.cafe.daum.net/subdued20club/ReHf/4121480?svc=cafeapp
이리역 폭발사고의 시발점은
뇌물요구 역무원은 징역 10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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