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주 할리우드 돌비 극장에서 열린 제92회 미국 아카데미(오스카)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일곱 번째 장편영화 ‘기생충’이 최우수 작품상까지 수상하면서 4관왕을 차지했다. 앞서 이 영화는 아카데미상 최고 영예인 작품상을 비롯해 감독·각본·편집·미술·국제장편영화(옛 외국어 영화)까지 총 6개 부문에 후보로 지명된 것만으로도 큰 화제를 모았다. ‘기생충’은 1962년 아카데미상에 첫 도전을 한 신상옥 감독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이후 처음으로 한국 영화가 아카데미상 최종 후보에 올랐으며, 작품상을 포함해 4개 부문에서 상을 받으며 한국 영화의 역사를 새로 썼다.
각본상을 시작으로
사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oscar)
영화 ‘기생충’은 빈부격차와 계급갈등과 같은 보편적인 주제를 색다른 방식으로 다룬 점을 인정받아 전 세계가 주목하는 영화에 등극했다.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최고 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데 이어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영국 아카데미 각본상과 외국어영화상, 미국 배우조합(SAG) 앙상블상, 작가조합(WGA) 각본상, 미술감독조합(ADG) 미술상, 편집자협회(ACE) 편집상 등을 받으며 한국 영화 역사상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더불어 아카데미 시상식 하루 전날, 미국 산타모니카에서 열린 제35회 필름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즈(FISA)에서 최우수 국제영화상을 받아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에 기대를 모으기도 했다.
사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oscar)
사람들은 여기까지 온 것 만해도 대단하다고 치켜세웠지만, ‘기생충’의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제92회 미국 아카데미(오스카) 시상식에서 ‘기생충’은 각본상을 시작으로 기적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장 강력한 경쟁작으로 지목된 ‘원스 어폰 어 타임…인 할리우드'(쿠엔틴 타란티노)를 비롯하여 ‘나이브스 아웃'(라이언 존슨), ‘결혼이야기'(노아 바움백), ‘1917’(샘 멘데스)의 쟁쟁한 작품을 제치고 받은 상이었다. 더불어 한국 영화 최초를 넘어 아시아계 작가 최초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과 한진원 작가는 나란히 무대에 올라 수상소감을 전했다.
사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oscar)
봉준호 감독은 “땡큐 그레이트 오너(감사합니다, 큰 영광입니다)”라고 기쁜 마음을 전하며 “시나리오를 쓴다는 게 사실 고독하고 외로운 작업이다. 국가를 대표해서 쓰는 건 아니지만, 이 상은 한국이 받은 최초의 오스카상”이라고 소감을 말했다. 이어 “언제나 많은 영감을 주는 아내에게 감사하고 대사를 멋지게 화면에 옮겨준 기생충 배우들에게 감사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진원 작가는 “미국에는 할리우드가 있듯 한국에도 충무로가 있다. 충무로의 모든 필름 메이커들, 스토리텔러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고 말해 감동을 줬다.
사진: 미국 abc 캡처 화면
한편, ‘기생충’이 호명되자 한국계 캐나다인 배우 샌드라 오가 기립 손뼉을 치며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이 화면에 잡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ABC 방송의 ‘그레이트 아나토미’에 출연으로 이름을 알린 그는 국내 팬들에게도 친숙한 배우로 지난해 드라마 ‘킬링 이브’로 아시아계 최초 골든글로브 TV 부문 여우주연상을 받은 이력이 있다.
사진: 미국 abc 캡처 화면
예상했던 국제영화상,
외국어영화상 → 국제영화상으로 바뀐 이후 처음
사진: 미국 abc 캡처 화면
각본상 다음으로 기생충이 받은 상은 국제영화상이다. 한국은 1962년 신상옥 감독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시작으로 매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부문에 출품해왔지만, 후보에 이름도 오르지 못했던 설움이 있었다. 이미 기생충이 골든글로브와 영국 아카데미에서 외국어영화상을 받는 등 외국어 상을 휩쓸었기에 오스카 수상은 어느 정도 점쳐진 상태였다. 봉 감독이 호명되자 객석에서는 각본상에 이어 두 번째로 무대에 오른 그를 향해 기립 박수로 축하의 메시지를 전했다.
사진: 미국 abc 캡처 화면
봉 감독은 “외국어영화상에서 국제영화상으로 이름이 바뀐 이후 처음 받게 되어 더욱 의미가 깊다. 바뀐 이름이 상징하는 바와 오스카가 추구하는 방향에 지지와 박수를 보낸다”고 말했다. 이어 “함께 만든 배우 스태프가 여기 와 있다”며 객석에 앉아있는 배우들의 이름을 한 명씩 부르며 박수를 이끌었다. 그는 영어로 “오늘 밤은 술 마실 준비가 돼 있다. 내일 아침까지 말이다”라고 수상 소감을 마쳐 큰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
사진: 미국 abc 캡처 화면
여태까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거머쥔 아시아계 감독은 대만 출신 이안 감독뿐이었다. 이안 감독은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 ‘라이프 오브 파이’로 두 차례 감독상을 받은 바 있다. 하지만 두 작품은 할리우드 자본과 배우들이 출연한 할리우드 영화였기에 많은 매체에서는 봉준호 감독이 감독상을 받지 못할 확률이 높다고 조심스럽게 예측했다. 특히 ‘아이리시맨'(마틴 스코세이지), ‘조커'(토드 필립스), ‘1917’(샘 멘데스), ‘원스 어폰 어 타임…인 할리우드'(쿠엔틴 타란티노) 등 쟁쟁한 작품들이 경쟁작이었기에 더욱 감독상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사진: 미국 abc 캡처 화면
그러나 봉 감독의 이름이 호명되고 마침내 그는 각본상, 국제영화상에 이어 3번째로 무대에 오를 수 있게 됐다. 약간 얼떨떨한 표정으로 수상 소감을 시작한 그는 “조금 전에 국제영화상을 수상하고 오늘 할 일은 끝났구나 했는데 너무 감사하다”고 운을 뗐다.
사진: YTN NEWS
이어 “어렸을 때 항상 가슴에 새겼던 말이 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책에서 읽었는데, 누가 하신 말이냐면”하고 숨을 고른 뒤, “바로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다”라며 객석에 앉아있던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는 “마틴 영화를 보면서 공부를 했던 사람이라 같이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영광인데, 상을 받을 줄 몰랐다. 또 제 영화를 아직 미국 관객들이 모를 때 항상 제 영화를 리스트에 뽑고 좋아하셨던 ‘쿠엔틴 형님'(쿠엔틴 타란티노)도 계신데 너무 사랑하고 감사하다. 쿠엔틴 ‘아이 러브 유'”라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같이 후보에 오른 분들도 모두 멋진 감독들인데 이 트로피를 오스카에서 허락한다면 텍사스 전기톱으로 다섯 개로 잘라서 나누고 싶은 마음입니다.”라고 유머러스한 소감을 덧붙였다.
아카데미 최고 영예 작품상까지 휩쓸다
사진: 미국 abc 캡처 화면
감독상까지 거머쥐며 3관왕을 차지한 이후 작품상까지는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을 뒤엎고, 아카데미 최고 상인 작품상까지 휩쓸며 무려 4관왕을 기록했다. ‘포드 V 페라리’, ‘아이리시맨’, ‘조조 래빗’, ‘조커’, ‘작은 아씨들’, ‘결혼 이야기’, ‘1917’,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등 화려한 감독들의 걸작을 제치고 받은 상이라 더욱 뜻깊다. 아울러 외국어 영화로는 오스카 작품상을 받은 것은 아카데미 역사상 처음이고,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동시에 거머쥐는 것도 1955년 델버트 맨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 ‘마티’ 이후 역대 두 번째라는 점에서 놀라운 성과다.
사진: 미국 abc 캡처 화면
작품상 수상작으로 ‘기생충’이 호명되자 봉준호 감독을 비롯한 출연 배우들은 환호했고, 모두 함께 무대에 올라 수상의 기쁨을 나눴다. 제작자 곽신애 바른손 E&A 대표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 일어났다. 너무 기쁘다”며 “지금 이 순간이 굉장히 의미 있고, 상징적인 시의적절한 역사가 쓰인 기분이 든다. 이런 결정을 해준 아카데미 회원분들의 결정에 감사드린다”고 수상소감을 전했다.
사진: 미국 abc 캡처 화면
이어서 투자 제작을 맡은 이미경 CJ그룹 부회장도 무대에 올라 소감을 전했다. 그는 “불가능해 보이는 꿈이라도 지원해주셔서 감사하다”라며 “특히 정말 말씀드리고 싶은 건 한국 영화 보러 가주시는 분들”이라고 말했다. 이어 봉 감독을 향해 “그의 머리, 그가 말하고 걷는 방식, 특히 그가 연출하는 방식과 유머 감각을 좋아한다”라며 찬사를 보냈다.
사진: 미국 abc 캡처 화면
한편 봉 감독의 발언이 오스카를 움직이게 한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미국 매체 벌처와의 인터뷰에서 아카데미 최종 후보에 오른 소감을 묻는 질문에 봉 감독은 “오스카상은 국제영화제가 아니다. 그저 로컬 행사일 뿐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백인 중심의 배타적인 영화제라는 딱지가 붙은 아카데미 시상식을 비판하는 발언이었다. 실제로 abc방송 진행자는 아카데미 시상식 레드카펫에 선 봉준호 감독에게 “감독으로서 다른 영화는 영어로 만들었는데 왜 이번 영화는 한국어로 만들었느냐”라는 다소 무례한 질문을 하기도 했다.
사진: 미국 abc 캡처 화면
결국 6개 부문 노미네이트와 더불어 4관왕을 차지한 봉준호 감독은 한국 영화 역사뿐 아니라 오스카의 역사도 새로 쓰는 기염을 토했다.
글 : 이윤서 press@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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