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1월 8일,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에서 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이하 직함 생략)는 태어났다. 고향인 울진에서는 울진남부국민학교를 거쳐 울진중학교 2학년까지 다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그의 정치적 기반인 대구로 향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당시 울진농고에서 근무하던 부친이 아들의 장래를 위해 대구의 경상중학교로 전학을 시킨 것이다. 이후 주호영은 조계종 종립학교인 능인고등학교를 거쳐 영남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해 법조인으로서의 꿈을 키우게 된다.
20년간 판사로, 그리고 국회에
주호영이 사법고시에 합격한 것은 1982년이었다. 제24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그는 판사로서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는데, 이후 대구지법 부장판사로 퇴직할 때까지 20여 년간 법조인으로 일하게 된다. 판사 재직 시절 주호영은 대구의 유력 현역의원을 구속하는 판결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가 법복을 벗은 것은 2003년으로, 이후 자신의 이름을 내건 변호사 사무실을 열게 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정치인으로서의 길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2004년 주호영은 한나라당의 문을 두들겼다. 그해 열린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광역시 수성구을 선거구에 공천을 받았으며, 김성현 새천년민주당 후보, 윤덕홍 열린민주당 후보를 크게 앞선 66.5%의 득표율, 62,927표를 득표하며 당선됐다. 그가 정치권에 입문하게 된 것은 조계종의 추천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주호영은 독실한 불교 신자로, 어릴 때는 집 근처의 동림사를 오가며 부처님 말씀을 공부했고 고등학교 때는 조계종 종립재단학교에 재학하며 불심을 키웠다고 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의 만남
법조인이 된 이후로도 주호영은 불교를 가까이했다. 불교 신도를 대상으로 법률 문제를 자문하면서 많은 스님과 연을 맺었으며, ‘자우’라는 법명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주호영을 모르면 스님이 아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불교계에서 주호영의 인맥은 탄탄하다. 국회의원으로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주로 법사위에서 활동했는데, 2004년 260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국가 NGO 모니터단의 국감평가 결과 법사위 1위 의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국회에 입성한 주호영에 대한 평가는 차분하고 논리정연한 의원이라는 것이었다. 덕분에 그는 TV 토론 프로그램 등에 자주 얼굴을 비추며 인지도를 높일 수 있었다. 2006년부터는 한나라당 원내부대표를 역임하는 등 초선의원으로 의욕적인 활동을 펼치던 그에게 새로운 만남이 찾아온 것은 2007년이었다.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명박 당시 후보가 주호영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친이계로 활동하며 승승장구
이명박 당시 후보는 기독교에 기반을 둔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주호영 영입에 열을 올렸다. 대선을 앞두고 치러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서 주호영은 이명박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으며, 이후 당내에서는 친이계이자 비박계로 분류되게 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주호영을 직접 영입해 비서실장으로 삼았으며, 당선 이후에는 당선인 대변인 역할을 맡기게 된다.
친이계로 활동하면서 주호영의 이름값은 점점 높아져 갔다. 2008년 제18대 총선에서는 유시민 전 장관과 사실상 1:1 구도를 형성하면서 주목을 받았으며, 득표율은 이전 선거와 크게 다르지 않은 65.36%를 기록하면서 압도적인 승리를 기록했다. 재선 이후에는 한나라당 원내 수석 부대표, 국회 운영위원회 간사를 지냈으며, 2009년에는 처음 신설된 특임장관에 오르기도 했다. 특임장관은 대통령직 인수위 때 정무장관에서 이름이 바뀐 직책으로, ‘대통령이 특별히 지정하는 사무를 처리하고 대통령이 국무총리에게 명하여 국무총리가 지정하는 사건을 처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3선, 그리고 공천학살
2010년까지 특임장관을 역임한 이후에는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직을 이듬해까지 유지하게 된다.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현 여의도연구원)는 국내 최초의 정당 정책 연구원으로, 보수 정당의 싱크탱크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다. 당의 주요 직책을 두루 맡아 승승장구하던 주호영은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도 남칠우 민주통합당 후보, 대구광역시의원 출신의 무소속 정기조 후보와 겨뤄 64.23%, 50,953표를 득표하며 3선 의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3선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새누리당 대구시당위원장, 정책위의장, 국회 정보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대통령비서실 정무특별보좌관에 박탈되기도 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주호영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2016년이었는데, 당시 친박계가 새누리당에서 비박계를 배제하는 이른바 ‘공천학살’이 벌어진 것이다. 주호영 또한 예외는 아니었는데, 그는 이에 반발하여 탈당한 후 제20대 총선에 무소속 후보로 동일 지역구에 출마를 결정하게 된다.
탈당, 그리고 다시 복당
이로 인해 대구시 수성구을 지역구는 새누리당 이인선 후보, 더불어민주당 정기철 후보와 무소속 주호영의 3파전으로 치러지게 됐다. 그리고 놀랍게도 선거 결과, 무소속으로 출마한 주호영이 46.83%, 42,386표를 득표하며 35.46%를 득표한 이인선 새누리당 후보를 누르는 이례적인 상황이 펼쳐졌다. 이후 주호영은 새누리당으로 금의환향했으며, 이어 새누리당 당대표에 도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정병국 후보와 단일화에 합의하여 비박계 단일 후보로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전당대회 결과는 이정현 전 의원의 압도적인 승리로 귀결되고 말았다.
친이계, 비박계 의원으로 활동하던 주호영은 이후 김무성 전 의원 등과 함께 당을 집단 탈당했다. 그리고 개혁보수신당에서 창당을 준비하며 바른정당의 시작과 함께하게 된다. 바른정당 내에서 선대위원장, 원내대표, 대표권한대행직 등을 수행하며 지도부로 활약했지만, 그 행보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는 바른정당 통합파와 함께 보수 통합을 명분으로 다시금 탈당을 선언했으며, 바른정당의 전당대회가 열린 날에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했다.
보수 재건의 숙제, 미래통합당 원내대표
보수의 재건이 주된 이슈였던 제21대 총선에서 주호영은 자신의 선거구가 아닌 다른 곳으로 전략공천됐다. 원래의 선거구였던 대구시 수성구을에는 이인선 미래통합당 후보가 전략공천됐으며, 홍준표 무소속 후보가 출마하면서 격전이 벌어졌다. 당에 의해 전략공천이 결정된 주호영의 지역구는 대구시 수성구갑이었다. 행정안전부 장관을 지낸 김부겸 전 의원을 잡기 위해, 대구 지역에서 명망이 높은 그가 해당 지역구에 공천된 것이었다.
총선 결과는 주호영의 승리였다. 주호영은 59.81%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TK 지역 최다선(5선)이자 당내 최다선 의원으로 떠올랐다. 당내 대선주자급 의원들이 험지에 출마해 줄줄이 고배를 마신 상황이었기에, 향후 주호영의 영향력은 더 커지게 될 것으로 전망됐다. 그리고 이러한 예측은 사실이 됐다. 2020년 5월 8일 주호영은 비박계 복당파임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미래통합당의 신임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당내에서 ‘경륜 있는 협상가’라는 평가가 주요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부동산 논란을 딛고 일어설 수 있을까
미래통합당의 신임 원내대표가 된 이후 주호영에 대한 평가는 호의적이다. 당내 분란이 심한 상황에서도 상당한 지도력을 보이며 외연 확장에도 적극적이라는 평가다. 또한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식,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1주기 추도식에 참석하는 등 이례적인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이후 그는 더불어민주당의 상임위원장 선출 표결 강행에 책임을 지겠다며 원내대표직 사의를 표했으나, 6월 25일 국회에 복귀해 만장일치로 재신임을 받으며 대표직에 복귀했다.
다만 현재는 시장의 뜨거운 이슈인 부동산 문제에 휘말려 곤혹을 겪는 중이기도 하다. 지역구인 대구의 아파트를 팔고 서울 강남의 아파트를 남겨 둔 점이 드러나면서, 자신의 기반이 되는 지역구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이다. 그가 소유한 반포 주공 1단지의 재개발 진행에 있어서도, 본인의 이익이 직접 관여된 부동산 3법 개정으로 특혜를 누렸다는 비판이 나오는 상황이다. 원내대표직을 수행하며 명망이 높아지고 있는 와중에 닥친 이 위기를 과연 주호영은 넘어설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글 : 최덕수 press@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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