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명의 사람이 있다면 백 개의 스타일이 있다. 당신이 백화점 마네킹의 옷을 그대로 벗겨내서 입는다고 해도 그것은 당신의 스타일이다. 그러나 때로는 조금 더 다르게, 조금 더 특이하게 스스로를 꾸미고 싶은 순간이 있다. 그런 당신에게 도시 구석의 빈티지 숍으로 들어가 보길 권한다. 누군가가 입던 옷, 정체불명의 옷, 빈티지(vintage). 그 모호한 매력으로 새로운 스타일을 완성해보자.
세상에 한 벌뿐
사실 빈티지는 옷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단어라는 사실, 알고 있는가? ‘빈티지(vintage)’란 본래 ‘와인의 원료가 되는 포도를 수확하고 와인을 만든 해’를 뜻한다. 그해 포도의 품질에 따라 와인의 맛도 달라지기에 와인 애호가들에게 ‘빈티지’는 중요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걸치는 ‘빈티지’ 의류는 어떨까. 누군가가 한 번쯤 입었다가 까닭 모를 사정으로 나의 눈앞에 놓여진 옷은, 그 재질과 상태에 따라 단 한 벌뿐인 개성을 가지고 있다. 포도의 ‘빈티지’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듯, 옷의 ‘빈티지’ 또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내 취향 알아보기
그렇다면 빈티지를 어떻게 입어야 할까? 처음 빈티지 숍에 들어간 사람들은 두 가지 때문에 놀란다. 첫 번째는 옷들의 무한한 스타일이다. 한쪽에는 오래된 명품 정장이, 한쪽에는 꾸러기 스타일의 항공재킷이, 또 한쪽에는 레이스가 가득한 원피스가 있다. 두 번째는 낡지는 않았으나 어딘가 손이 탄 듯한 사용감이다. 그렇다. 빈티지 의류는 자신만의 취향을 가진 누군가가 한때 입었던 옷이다. 그리고 그 취향의 가짓수만큼이나 빈티지 의류에는 다양한 스타일이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나만의 스타일을 고르며, 나만의 취향을 알아볼 수 있다.
내 몸의 치수는?
나에게 맞는 옷을 찾는 데 가장 중요한 건 뭘까? 디자인? 퀄리티? 바로 치수다. 아무리 마음에 드는 옷이나 신발도 나와 맞지 않는다면 옷장에서 썩기 마련이다. 치수는 빈티지 입문의 높다란 장벽이기도 하다. M, 95 등 익숙한 사이즈 표기에 맞춰 옷을 사던 사람들도 브랜드마다 M의 크기가 모두 다르다는 것을 안다.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유럽, 미국 등 다양한 국가에서 도착한 빈티지 의류의 경우, 이 차이는 더욱 심하다. 결국 우리가 믿을 건 두 가지다. 직접 입어보거나, 표기된 수치를 확인하거나. 특히 온라인에서 빈티지를 구매하다 보면 믿을 건 숫자뿐이다. 그러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분은 자신의 몸 치수를 알게 될 것이다.
높아지는 안목
수만 개의 스타일 속에서 나에게 딱 맞는 옷 한 벌을 골라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치수는 물론 디자인, 품질, 브랜드까지 빈티지 구매에 있어서 고려할 문제는 열 손가락을 가득 채운다. 그러다 보면 당신은 마음에 드는 옷을 넘어 어떤 옷이 ‘좋은 옷’인지 점점 알게 된다. 니트 성분표에서 울, 캐시미어 함량이 높은지 따지게 되고 최근에도 인기가 유지되는 브랜드인지 고려해보게 된다. 무엇보다 지금 내 옷장의 옷들과 함께 입을 수 있는 옷인지 따져보게 된다. 그러는 동안 당신의 패션 안목은 쑥쑥 성장한다.
브랜드 섭렵하기
빈티지를 판매하는 사람들은 어떤 기준으로 가격을 매길까? 누군가의 손을 한 번 거쳤다고 해서 모두 같은 가격에 판매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떤 옷이 비싼 빈티지일까? 청결도? 재질? 디자인? 빈티지 의류 책정가격의 최우선순위는 바로 브랜드다. 브랜드는 고객에게 몇 가지 이익을 보장한다. 그 브랜드를 구매한 취향을 보장하고, 브랜드를 구매한 재력을 보장한다. 그래서 디자이너 브랜드를 비롯한 백화점 입점 브랜드, 특히 국제적인 브랜드의 경우 빈티지라고 하더라도 비교적 높은 가격이 매겨진다. 그러니 평소 호감이던 브랜드의 빈티지 상품을 발견한다면, 일단 사자. 어차피 정가보다는 훨씬 싸니까.
진짜 이 가격이라고?
그렇다. 어쩌면 빈티지의 가장 큰 장점은 ‘가격’이 아닐까 싶다. 어떤 물건이든 한 번 사람의 손을 타면 중고품이 된다. 그리고 프리미엄이 붙지 않는 이상 중고품이 새것보다 저렴한 것은 자본주의의 진리겠다. 울 함량이 높은 코트를 니트 한 벌 값에 건지고, 마음에 쏙 드는 티셔츠를 만 원짜리 한 장에 구매할 수 있는 곳. 그것이 바로 빈티지의 세계다. 믿을 수 없다고? 새 물건이 비싼 게 당연한 것처럼 빈티지가 싼 것도 당연하니 남은 것은 소비자의 선택이다. 빨리 한 벌 골라보자.
생각보다 깨끗하네
그러나 여전히, 당신은 빈티지가 누군가 입던 옷이라며 찝찝해할지도 모른다. 당연한 일이다. 전 옷 주인이 체취가 어땠으며 피부 상태가 어땠는지, 샤워는 얼마나 자주 했는지 알 길이 없지 않은가. 게다가 빈티지에 죽은 사람의 영혼이 달라붙어 있더라는 식의 괴담도 있다. 하지만 걱정 마라. 빈티지 의류 판매업자들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노련하고 깔끔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조금 더 높은 가격을 받기 위해서라도 옷들을 깨끗하게 세척한다. 다만, 옷 포대를 바로 풀어놓는 남포동 구제시장 좌판에서는 조금 주의할 필요가 있겠다.
모두 나만 바라봐
빈티지는 선택의 폭이 넓다. 원한다면 한 매장 안에서 면접룩을 완성할 수도 있고, 록 페스티벌에 입고 갈 만큼 화려하고 특이한 옷을 찾아낼 수도 있다. 분명한 건 빈티지 매장 안에는 면접룩보다는 반짝이나 무지개염색 옷이 많다는 것이다. 과연 누군가 이 옷을 입긴 입었던 걸까? 대체 이 옷을 만들어서 팔 생각을 한 건 누구일까? 수많은 질문이 당신의 머릿속을 맴돌겠지만,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독보적인 분위기가 매혹적이라는 사실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특히 당신이 관심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빈티지 매장의 단골 손님이 될 운명이다.
이 돈으로 명품을?
특이하고, 눈에 띄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빈티지 매장을 자주 기웃거린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단 한 가지만 전략적으로 공략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명품’이다. 브랜드 중의 브랜드, 명품은 정가를 주고 마련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빈티지라면 어떨까? 사용감이 있거나 약간의 수선이 필요하지만 그만큼 저렴한 가격에 가방 하나, 신발 하나, 벨트 하나 구해볼 수 있다. 다만 빈티지 의류의 특성상 로스(정식 판매되지 않아 상표가 안 붙은 상품)나 이미테이션(모조품)이 섞여있으니, 당신의 신중한 눈썰미를 발휘할 시점이다.
지구를 사랑하는 옷
할리우드 배우 에즈라 밀러는 자신만의 규칙이 있다. 절대로 새 옷을 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직접 섬유산업에 대해 조사해보면 알 거예요.” 그의 말처럼 지금 지구는 섬유산업으로 인해 무수히 쏟아지는 옷 더미에 깔려 죽을 지경이다. 팔리지 않는 옷들은 불태워지고, 신상들은 계속 나타난다. 가난한 노동자들은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한다. 이러한 의류 산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빈티지다. 이미 생산된 좋은 옷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고 새 옷 대신 구매하는 것. 쇼핑의 욕구도 채우고 지구에게 죄도 짓지 않는 탁월한 패션 전략이 아닐까.
글 : 서국선 press@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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