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김기현(왼쪽) 대표와 인요한 혁신위원장이 6일 국회 당 대표실에서 만나고 있다. [연합] |
혁신(革新). 매력적인 단어다. ‘묵은 풍속, 관습, 조직, 방법 따위를 완전히 바꾸어서 새롭게 함’이란 게 사전적 의미다. ‘혁’은 갓 벗겨낸 가죽(皮)으로, 이를 손질해 새로운(新) 가죽(革)으로 탈바꿈시킨다는 뜻이다. 짐승의 가죽(皮)을 벗겨 처음엔 겨울추위 방패용으로만 단순 사용했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동차 시트나 최고급 소파나 가방(革)으로 가치를 확 높인 ‘혁신’. 이는 사람들을 매료시켜왔다.수십년간 혁신이 관가나 재계, 정계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끄집어내진 것은 이 때문이다. 위기때마다 관가는 ‘공무원의 일대 혁신’을 부르짖었고, 기업은 ‘기술과 시스템의 혁신’을 주창했다. 정치권 역시 깊은 수렁에 빠질라하면‘일대 혁신’의 목소리를 외쳐왔다.
국민의힘이 지난 강서구청장 선거 참패로 멘붕에 빠진뒤 어김없이 꺼낸 것도 ‘혁신 카드’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총선에서 자멸할 것이라는 긴장감에 “혁신 아니면 답이 없다”고 한마디씩 거들었다. 인요한 혁신위원회는 그렇게 출범(10월26일)했다. 여당은 제대로된 혁신을 해달라며 의사이자 교수인 인요한 위원장을 택했다. 인 위원장은 원래 미국 국적 의사였지만, 한국형 구급차 앰뷸런스 개발 등을 통해 대한민국 사회에 공헌한 공을 인정받아 2012년 특별귀화했고, 이때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 측의 국민대통합위원장을 맡은 바 있어 정치경험이 전혀 없는 이는 아니었다. 인품도 좋다고들 했다. 인 위원장은 여당 구원투수 부름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열정적으로 일할 것임을 공언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야 한다”는 이건희 회장의 말을 차용하면서 고강도 대대적 혁신을 예고한 첫여정은 그럴듯했다. 당 통합을 내건 혁신안 1호가 정작 당사자인 홍준표 대구시장이나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의 항의를 부르긴 했지만, 대체로 혁신위가 꿴 첫단추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2호, 3호, 4호, 5호 등 혁신안도 속도감 있게 수면위로 올려놨다.
자신감이 붙었을까. 혁신위는 아예 6호(불출마·험지 출마)안을 제시했다. 6호는 가장 높은 수위의 고강도 카드였다. 대통령 측근부터 불출마하라고 희생을 요구했고, 중진들이 자진해서 험지로 출마해야 한다며 기득권 포기를 종용했다. 아예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부터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압박했다. 여당 지도부의 뜨악한 표정은 이때부터 감지됐다. 김 대표는 “검토하겠다”는 원론적 멘트만 내놨을뿐, 행동의 진척은 없었다. 이 안은 한달이상 표류했다. 처음엔 ‘환상 궁합’이라며 속닥거렸던 김 대표와 인 위원장 사이에 틈이 벌어지고 있다는 시각은 이때부터 나왔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당 지도부가 침묵을 이어가자 혁신위 안색도 확 변했다.
인요한 혁신위 1호=당내 대사면
2호=하위 평가 20% 공천 배제
3호=청년 비례대표 50% 할당
4호=지역구 전략공천 배제
5호=과학계 비례 공천
6호=불출마 또는 험지 출마
지난 5일 윤석열 대통령과 김기현 지도부와의 오찬 역시 혁신위로선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김기현 체제로 총선을 치러야 한다’는 공감대를 재확인했다고 한다. 혁신위와 지도부가 정면충돌 양상을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지도부 초청과 ‘김기현 체제’ 운운은 윤 대통령이 김 대표에 힘을 실어준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낳았다. 혁신위 동력이 급전직하했다는 말이 떠돌았다.
이런 가운데 김 대표와 인 위원장은 6일 오후 회동했다. ‘주류 희생’안을 놓고 외부에 격한 대결로 비쳐지자 뭔가 소통이 필요했기에 다급하게 잡은 일정이다. 회동 후 양 측은 김 대표는 혁신안을 높이 평가했고, 인 위원장은 김 대표의 혁신 의지를 확인했다고 했다. 이로써 태풍전야의 혁신위-지도부 간 갈등은 일단 봉합됐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완전한 봉합’은 아니라는 게 지배적인 시각이다. 윤심(尹心)을 등에 업은 김기현 지도부의 판정승이라는 평가가 우세하다. ‘42 vs 15’가 이를 대변한다. 혁신위가 출범한 다음날인 지난달 17일 둘은 42분동안 대화했다. 이번 회동 시간은 15분이었다. 지난달 만남에선 줄곧 웃음꽃이 피었다. 6일 대면은 달랐다. 김 대표는 인 위원장을 향해 “많은 역할을 해줘 감사드린다”고 추켜세워줬지만, 인 위원장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회동 후 기자 질문에 묵묵부답인채 퇴장한 것에서 인 위원장의 복잡한 심경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입장에선 아마도 회동 성과는 ‘빈손’이요, 얻은 것은 ‘공허한 덕담’ 뿐이었다고 여겼을 법 하다. 김 대표는 혁신위 수고에 후한 점수를 주면서도 “다만 최고위에서 의결할 수 있는 사안이 있고 공관위가 전략적으로 선택할 일이 있어 바로 수용하지 못하는 점을 이해해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도부의 혁신 의지를 믿고 맡겨달라. 제안한 건은 당의 혁신과 총선 승리에 도움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고도 했다. 일단은 혁신위 안을 존중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혁신위 안을 향후 채택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혁신위가 기득권 타파가 혁신의 핵심이라며 줄기차게 요구해온 주류 희생안(지도부·중진·대통령 측근 불출마 또는 험지 출마)에 대한 완고한 거절로 분석하는 이가 많다. 한달 이상 줄다리기한 주류희생안은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혁신위가 샅바싸움만 벌인채 제대로 씨름 한판 못하고 판정패를 당했다는 평가는 그래서 뒤따랐다. ‘공허한 덕담’만 얻은채 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5일 국민의힘 지도부와 비공개 오찬 회동을 하고 있다. 이날 회동에는 김기현(왼쪽) 대표와 윤재옥 원내대표, 유의동 정책위의장, 이만희 사무총장 등 당4역이 참석했다. [연합] |
정치권 해석은 두가지로 갈린다. 하나는 강서구청장 선거 대패로 민심 회복이 발등의 불로 떨어졌던 여당이 ‘인요한 혁신위’를 발굴했고, 시선끌기엔 어느정도 성공했는데 키워드가 ‘주류희생’쪽으로 쏠리자 부담이 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는 마이너스라는 판단으로 혁신위를 재빨리 정리하는 수순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혁신위는 안을 만들어 지도부에 넘기면 그 역할이 끝나는 법인데, 인요한 혁신위가 지나친 욕심으로 흐르자, 이에 제동을 걸었다는 것이다.
혁신위가 과속한 측면은 없지 않아 보인다. 다만 이를 인 위원장이 순진했다는 쪽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전권을 준다”는 말을 혁신위가 어떤 안을 내더라도 모두 받아들인다는 약속으로 철썩같이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신감이 앞섰고, 초심에 없었던 욕심을 노출했다는 것이다.
여당 기득권과의 충돌 외에도 인 위원장의 설화가 혁신위 동력을 훼손한 것은 사실이라는 견해도 나온다. 초창기 ‘윤심(尹心)’을 운운함으로써 당내 적잖은 견제를 불렀고, 영남 중진들을 향해 “우유를 마실래, 아니면 매를 좀 맞고 우유를 마실래”라는 공격성 발언을 함으로써 신뢰에 화근을 남겼다는 것이다. 여당 관계자는 “특히 ‘준석이는 도덕이 없다’며 그 부모까지 거론한 말 실수는 인 위원장 평판에 큰 의심을 부른건 맞다”고 했다. 인 위원장이 김 대표에게 공관위원장 자리를 청했다는 말도 혁신위 동력에 흠집을 남겼다. 다만 혁신위원장에 도덕군자까지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인요한 혁신위는 결국 여당의 큰 기득권 앞에서 한계를 보일 수 밖에 없는 예정된 코스를 밟게됐다는 시각도 적지않다.
흥미로운 점은 인요한 혁신위는 지난 6월 출범하고 조기종료한 민주당의 김은경 혁신위와 여러가지 면에서 판박이였다는 것이다. 인요한 혁신위는 강서구청장 선거 참패의 충격을 딛고 일신우일신해야 한다는 위기감에서 출발했고, 김은경 혁신위는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 김남국 의원의 코인 거래 등 도덕성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한 고육책으로 출범했다. 김기현 대표는 인 위원장에 전권을 주겠다고 했고, 이재명 대표는 김 위원장에 전폭 지지를 약속했다. 혁신안 카드가 구체화되면서 여당이건 야당이건 당내 지도부와의 불협화음이 고조된 것도 공통점이다. 이준석 전 대표와 부모 발언, 노인 폄하 발언 논란으로 인 위원장, 김 위원장의 둘다 체면을 깎였던 것도 유사하다. 화려했던 첫날을 보내고 기득권과 좌충우돌음을 내다가 조용히 사라지는 것, 이게 혁신위의 운명인가.
기대가 컸던만큼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인요한 혁신위는 자체 논의를 통한 조기 활동 종료 수순에 돌입했다. 인 위원장은 김 대표와의 만남에서 “많이 배웠다”고 했다. 지식을 얘기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웃음 뒤엔 독이 있는 고도의 계산이 충돌하는, 자기 잇속만을 우선시하는 정치권 생리를 미처 몰랐다는 뜻일까. 확실한 건 많이 배웠다는 그의 말은 ‘화장실 갈때 올때 다르다’는 옛말을 새삼 깨달았다는 뜻과 다름이 아닐 것 같다.
김영상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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