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를 국빈 방문하는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1일 경기 성남 서울공항에서 출국에 앞서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 등 환송 인사들과 차례로 악수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연합] |
친윤(親尹) 핵심으로 꼽히는 장제원 의원이 불출마를 시사함으로써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의 결단도 임박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장 의원은 11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이제 잠시 멈추려 한다”고 했다. 장 의원은 소셜미디어에 이런 글을 올린뒤 몇몇 언론인터뷰를 통해 “윤석열 정부의 성공만큼 절박한 게 어디 있느냐. 제가 가지고 있는 마지막까지도 내놔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불출마 뜻을 명확히 한 것이다. 이날은 ‘친윤 핵심인사 및 당내 지도부·중진의 희생’을 요구한 인요한 혁신위의 활동이 종료된 날이어서 시점이 공교로웠다. 장 의원은 이에 “혁신위 방식을 수용하지 못했을 뿐 불출마 각오는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다”고 했다. 혁신위 압력에 굴하는 모습보다는 본인 스스로의 희생을 택했다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여당 대표 선출때의 ‘김장연대’ 한 축인 장 의원의 불출마 시사로 당장 김 대표의 결단 시기에도 관심이 쏠린다. 정가에선 윤석열정부에서 차지한 비중이 컸던 장 의원의 희생은 어쩔 수 없이 김 대표 쪽으로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김 대표의 입장은 현재 난처한 상태다. 혁신위가 출발만 요란했을 뿐, 빈손으로 끝났다는 평가가 짙어지면서 김 대표의 ‘책임론’은 활활 타올라 왔다. 그래서인지 김 대표는 11일 최고위에서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을 자세가 돼 있다는 뜻을 내놨다. 김 대표가 원팀을 주창하면서 “전권을 주겠다”고 약속했던 혁신위의 ‘불출마 또는 험지출마’안에 대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면서 그의 혁신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가 많아진 상황에서의 배수진성 발언이다. 대표직을 내려놓는다는 것인지, 불출마하겠다는 것인지, 험지 출마를 하겠다는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뭔가 결단을 하긴 하겠다는 것이다. 정가 일각에선 이에 언제 어떻게 기득권을 내려놓겠다는 것인지 모호하다며 시간끌기에 불과하다고 폄하했지만, 장 의원의 불출마 결심으로 김 대표의 결단도 종용받게 됐다.
김 대표의 결단 시기에 대한 관심 외에도 여당으로선 큰 숙제 하나가 떨어졌다. 김 대표의 결단 시점까지 당내 분위기가 심상찮은 분열 양상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예 살벌하다.
김 대표 사퇴를 압박해온 비윤 중진을 향해 11일 친윤 초선들이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으며 당내 분위기를 싸늘하게 한 점은 이를 대변한다. 국민의힘 초선의원들은 이날 당소속 의원 111명 전원이 모인 텔레그램 대화방에서 ‘자살특공대’, ‘진짜X맨’, ‘내부총질’이라는 단어까지 동원하며 특정인을 비판했다. 그 특정인은 부산 5선의 서병수 의원, 부산 3선의 하태경 의원이었다. 이들은 앞서 김 대표의 리더십에 의문을 표하며 사퇴를 주장해왔다. 두 사람은 “이 모양 이 꼴로 계속 간다면 국민의힘이 필패하리란 것만큼은 분명하다. (김 대표가)이제 결단할 때가 됐다”(서병수 의원·페이스북), “쇄신 대상 1순위는 김기현 대표다. 불출마로 부족하고 사퇴만이 답”(하태경 의원·페이스북)이라며 김 대표를 강하게 압박해왔다. 비주류 중진 둘의 이같은 행보에 큰 자극을 받았을까. 친윤 초선의원들을 중심으로 이날 단톡방에서 두 사람을 향해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도를 넘는 내부 총질에 황당할 따름”(김승수 의원), “소속 정당에 ‘좀비 정당’이라는 망언까지 해가며 당을 흔들려는 자가 진짜X맨”(강민국 의원), “대책 없는 지도부 흔들기는 최선봉 아군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것”(박대수 의원)이라는 등 험한 말이 줄줄이 새어나왔다. 최춘식 의원은 서병수, 하태경 의원을 직접 겨냥, ‘자살특공대’, ‘불난 집에 부채질’ 단어를 동원하면서 “진정 용퇴를 해야 할 의원”이라고 했다. 이에 대구·경북(TK), 부산·울산·경남(PK) 등의 초선의원들 10여명이 동조하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이들 초선의원들의 두 사람을 향한 이같은 독설은 김 대표를 옹호한 것으로, 그 배경에 대해 정치권의 시선이 쏠렸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떠나 이날 하루만큼은 여당에선 선배도 없고, 후배도 없는 분열의 모습을 보였다는 데는 이견은 없었다. “오늘만큼은 콩가루당이 됐다”(여당 당직자)는 자조적인 목소리가 나온 이유다.
정가 일각에선 이날 여당에서 노출된 ‘친윤 초선 vs 비윤 중진’의 대립각은 오늘날 국민의힘이 처한 적나라한 민낯 중 하나로 해석한다. ‘서울 자멸론’(국힘 내부 보고서), ‘타이타닉당’(김재섭 도봉갑 당협위원장) 소리까지 나오는 위기의 현실에 대한 책임감이 큰 중진들의 실리만 챙기려는 행보에 초선의원들의 실망감은 극에 달했고, 당내 선배에 대한 존중은 설자리를 잃었다는 것이다. 예전처럼 중진은 초선을 끌어주고, 초선은 중진에 의지하던 정치문화는 여당 내에선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배현진 의원이 ‘무능을 백번 자성해도 모자랄 이들이 지도부를 향해 사퇴를 종용한다’고 한 것은 이런 실망감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배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부산에서도 손꼽히는 초강세 지역 의원으로서 덕분에 유세차 한번 안타고 당선됐다는 전설이 돌던 사람”이라며 하 의원을 겨냥했다. 그러면서 “최근에는 헌신하며 수도권 험지 출마를 주장(?)했다가 동료 의원이 버젓이 있는 정치 1번지 출마를 공식 발표하며 모두를 기함하게 했는데, 이조차 소위 ‘다른 지역 네고’를 위한 기똥찬 꼼수라는 뒷말이 무성하다”고 했다. ‘갈지자 행보’라며 꼬집은 것이다.
아버지 고(故) 장성만 전 국회부의장 산소를 찾은 장제원 의원. [장제원 의원 페이스북·연합] |
초선 의원들의 ‘김기현 옹호’ 분위기에는 초선들의 이해타산도 얽혀 있다는 시각도 뒤따른다. 비윤 중진을 향해 거센 공세를 취한 이들은 대부분 TK나 PK 의원들이었다. 내년 총선에서 다시 공천을 받으면 상대적으로 당선 확률이 높은 곳의 의원들이다. 그래서 김기현 체제를 뒤흔들기 보다는 ‘안정’을 택하는 것이 공천에 유리할 수 있다는 셈법도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에 당내 주류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비윤 중진을 향해 집단 목소리로 성토하고, 견제하는 것이 이득이라는 공감대가 반영됐다는 것이다.
‘2차 나경원 연판장’이라는 말은 그래서 나왔다. 지난 1월 국힘 초선의원 48명은 당 대표에 출마하려던 나경원 전 의원을 비판하는 연판장을 돌렸고, 결국 나 전 의원은 불출마를 택했다. 당시 여론조사 상에서는 나 전 의원이 유력했는데, 초선 의원들의 집단 반발(?)로 당 대표 출마를 포기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전당 대회에선 김기현 대표가 선출됐고, 이때 초선의원들의 입김이 정말 세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그때 나 전 의원 연판장을 돌렸던 초선의원 중 상당수가 단톡방에서 서 의원, 하 의원에 대한 공세 고삐를 가동한 것이다.
어쨌든 여당 내 주류 실세로 꼽히던 장 의원의 불출마 시사와 김 대표의 예고된 결단 수순으로 돌입한 여당의 숨가쁜 분위기 속에서 초선의원들의 항명은 여러가지 시사점을 준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여당으로선 지도부와 거물급 중진들의 불출마 또는 험지 출마 등으로 혁신위안 수용의 난제를 풀어야 하는 동시에 이번에 확인된 주류, 비주류 간의 불협화음을 접고 당내 단합을 재정비해야 할 과제를 안게 됐다는 것이다. 여당의 한 고위당직자는 “내년 총선에서 서울 49곳 중 우세한 곳이 단 6곳 밖에 없다는 충격적인 여당 자체 보고서가 밖으로 새어나오면서 김 대표 사퇴론이 본격적으로 불붙었는데, 동시에 각각 의원들도 생존게임에 돌입한 것”이라며 “이해에 따라 서로 뭉치고, 서로 비난하고, 싸우는 일이 많아질 것 같다”고 했다.
“합리적이고 강력한 대안 없이 지도부를 흔드는 것은 필패의 지름길. 단결이 혁신”(박대출 의원·페이스북), “‘어떠한 분열도 나쁘다’는 말을 기억해야 할 때”(윤두현 의원), “분열보다는 단합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강대식 의원) 등의 일각의 당내 경계론이 현재로선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다.
국민의힘의 내년 총선을 향한 길은 현재로선 이같이 어둠이 쫙 깔려 있다. 어둠 속에서 총선을 치를 것이냐, 어둠을 걷어낸뒤 총선을 치를 것이냐, 이는 국민의힘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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