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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바짓가랑이 잡는 외교정책, 낡았고 극단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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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학 곳곳에서 학생들이 점거 시위에 나선다. 미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 나라와 결코 무관하다 할 수 없는 한 지역의 전쟁 때문이다. 아니, 전쟁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민간인 학살이다. 학생들은 민주당 소속 대통령이 이끄는 연방정부가 더 이상 학살자를 지지하지 말고 전쟁을 하루빨리 끝내기 위해 앞장서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오직 폭력 진압이다. 대학 총장들은 캠퍼스에 텐트를 치고 농성을 벌이는 학생들을 해산시켜달라며 경찰에게 캠퍼스 진입을 요청한다. 뉴욕 컬럼비아 대학에서 점거 시위가 시작된 지 한 달만에 전국에서 거의 3천 명이 연행된다. 언론은 이런 시위 양상이 연말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촉각을 곤두세운다.”

몇 달 전만 해도 위 두 문단을 예문으로 내놓은 뒤에 무엇을 묘사한 글이냐고 물으면, 십중팔구 ‘1968년’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전쟁’이란 베트남 전쟁을 말하며, ‘민주당 소속 대통령’이란 린든 B. 존슨일 테고, ‘대통령 선거’란 리처드 닉슨이 당선된 1968년 선거를 일컫는다고 장담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55년 전 이야기가 아니라 2024년 5월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바로 지금도 미국 대학생들은 이스라엘군의 가자 주민 학살을 규탄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다. 예전 같았으면 미국 시민 중 압도적 다수가 이스라엘을 편들면서 이런 시위를 불편해 했을 텐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여론이 미국 역사상 유례없이 높다. 3월 갤럽 조사에서 55%가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침공에 반대했다.

이러한 ‘반대’ 비율은 민주당 지지자일수록 더 높다. 민주당 지지자의 75%가 가자 침공에 반대했다. 여전히 이스라엘을 편드는 조 바이든 대통령 입장에서는 재선에 빨간불이 켜졌다. 반세기 전에 민주당 지지층 내부의 투쟁이 공화당 후보에게 어부지리가 됐던 것처럼, 이번에도 공화당 대선 예비경선 선두주자 도널드 트럼프가 최후의 승자가 될 가능성이 만만치 않다. 아무래도 2024년은 또 다른 ‘1968년’이 될 것만 같다.

▲ 지난 9일(현지시간) 이스라엘 남부 가자지구 분리장벽 인근에 이스라엘군 탱크와 장갑차들이 집결해 있다. 이날 이스라엘군은 하마스의 최후 보루로 여겨지는 가자지구 최남단 도시 라파에서 민간인 15만 명이 대피했다고 밝혔다. ⓒEPA=연합뉴스

<연결된 위기> 그리고 <30년의 위기>

그런데 점차 당선 가능성을 높이고 있는 트럼프 진영이 꺼내놓는 외교안보 담론이 사뭇 충격적이다. 주한미군 철수론이 계속 흘러나오는가 하면, 제2기 트럼프 정부가 들어설 경우에 외교안보보좌관으로 유력시되는 엘브리지 콜비 전 국방부 부차관보는 <중앙일보>와 나눈 대담에서 핵폭탄 같은 발언들을 잔뜩 쏟아냈다. 이를테면, 이런 내용들이다.

“한국은 미국의 재래식 전력 지원에 대한 기대를 줄이고, 직접 한반도를 방어해야 한다.” “그래서 한국의 독자적 핵무장까지 고려한 모든 카드를 테이블 위에 올려야 한다.” “핵확산 방지 정책은 실패했다 … 우리를 위협하는 자들이 전혀 지키지 않는 규범을 우리만 지키기 위해 ‘벌’을 받을 순 없다. 오히려 뒤처진 핵균형을 위해 핵무기를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 (<중앙일보> 2024. 4. 25)

그 중에서도 압권은 다음 발언이다.

“동맹은 비즈니스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말처럼 미국은 미국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한국도 한국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이게 현실이다. 동맹을 낭만으로만 바라보면 적과의 대결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미국은 한국을 돕는 게 아니다. 한국이 미국 안보에 중요하고, 중국 견제를 위해 중요하기 때문에 역할을 하는 것이다. 트럼프의 이러한 관점은 전적으로 옳다.” (<중앙일보>, 위 기사)

물론 트럼프가 연말 대선에서 승리하더라도 콜비가 외교안보보좌관이 된다는 보장은 없으며, 따라서 위 발언들이 제2기 트럼프 정부 정책으로 확정되어 있다고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미국의 대중(對中) 전략을 위해 한국이나 일본의 핵무장이 용인되고 주한미군이 노골적으로 대중 군사작전을 벌이는 경천동지할 세상은 더는 SF소설 속 미래만은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참으로 얄궂은 인과관계가 전개되는 셈이 된다. 이스라엘 학살에 반대하는 시위는 미국의 잘못된 대외정책에 대한 시민들의 각성이며 이를 시정하려는 양심의 발로다. 그러나 민주당 역시 공범인 이런 현실을 둘러싸고 미국 내 여론이 충돌하고 양대 정당의 기존 지지 기반이 흔들릴수록 트럼프주의 같은 더 혼란스러운 정책 조합이 미국의 정책으로, 그리고 이에 따라 전 세계의 대세로 부상하게 된다. 가령 콜비의 발언에서 예상되는 것처럼, 동아시아에는 대혼돈이 펼쳐지게 된다.

미국 국내 정치의 역학이, 심지어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는 변동조차 오늘날 우리 세계에서는 전 지구적 혼돈의 진원이 된다. 실은 이런 심술궂은 모순을 설득력 있게 파헤치는 본격 연구서도 이미 나와 있다. 올해 초에 나온 차태서 성균관대 정치외교학 교수의 <30년의 위기: 탈단극 시대 미국과 세계질서>(성균관대 출판부, 2024)가 그 책이다.

책을 한 권 더 꼽자면, <30년의 위기>보다 먼저 나온 백승욱 중앙대 사회학 교수의 <연결된 위기: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한반도 핵위기까지, 얄타체제의 해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생각의힘, 2023)도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미국 주도 단극체제의 출발점을 냉전이 해체된 1990년대 초가 아니라 오히려 냉전이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시점으로까지 소급한다. 소련은 사실 미국 주도 체제의 한 구성요소였고, 따라서 냉전 시기도 단극시대의 일부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제2차 세계대전 와중에 국제관계의 분수령이 된 연합국 정상회담의 이름을 따서 이 ‘장기’ 단극시대에 ‘얄타체제’라는 이름을 붙인다.

<연결된 위기>는 이 핵심 명제에 더해 여러 색다른 주장들을 덧붙이는데, 이 때문에 흥미진진해지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산만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책이 꺼내놓는 또 다른 중심 주장이 있다면, 그것은 저자가 ‘얄타체제’라 부르는 오래 된 국제관계의 골격을 무너뜨리는 힘이 다른 무엇보다 중국, 더 정확히는 시진핑 체제 중국의 위협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중-대북 안보동맹 파트너로서 일본을 재평가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묻어 있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저자가 혁명 이후 중국 사회를 깊이 연구해왔다는 사정이 반영돼 있기도 하다.

반면 <30년의 위기>는 이와 대비된다. 진단이 전혀 다른 것은 아니다. 이 책 역시 최근에 미국 주도 단극체제가 끝나가고 있으며 이와 함께 대혼돈이 열리고 있다고 진단한다. 하지만 이런 결론에 이르는 과정에서 <30년의 위기>는 시야를 <연결된 위기>마냥 방만하게 넓히기보다는 고도로 집중한다. 미국 주도 단극체제가 막을 내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 힘이 미국 내부 역학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미국의 역사와 최근 정치 변동, 문화 흐름으로부터 읽어낸다. 중국이나 러시아의 위협은 이런 내부 균열과 와해에 비하면 2차적, 부차적 요소일 수 있다. 뿌리는 안에 있다.

<30년의 위기>의 이러한 접근법을 보다 선명히 이해하려면, 제목이 왜 ’30년의 위기’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이는, 우리에게는 지나치게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로만 알려진 영국 역사학자 E. H. 카의 걸작 <20년의 위기>(김태현 옮김, 녹문당, 2014)를 원용한 제목이다.

<20년의 위기>에서 카는 19세기 국제질서를 지탱해온 영국의 자유주의적 이상주의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 시기에 결국 변화된 현실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간 과정을 냉정히 짚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차태서는 <30년의 위기>에서 최소한 지난 30년간(‘얄타체제’식 논의에 따르면, 차라리 지난 80년간) 지속된 미국 주도 단극체제가 그 이데올로기 기반인 자유주의적 이상주의에 대한 ‘미국 내’ 도전 탓에 와해될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드러낸다.

이를 위해 저자는 19세기 초부터 미국 사회에 엄연히 존속하던 서민 친화적이고 배외주의적인 잭슨주의 포퓰리즘을 추적하고, 트럼프주의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별난 현상이 아니라 이런 유서 깊은 전통의 특정한 발현임을 일깨운다. 또한 이미 1960년대 말에 미국의 자유주의적 개입주의가 베트남전쟁을 통해 모순을 드러내자 비록 트럼프만큼은 아니어도 당대에는 상당히 이단적이었던 닉슨-키신저 노선이 등장한 전례도 있다고 지적한다. 어떻게 보든 단극시대의 이데올로기였던 미국식 자유주의는 미국 자체의 맥락 안에서 볼 때 안정되거나 확고한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흐름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30년의 위기>의 각 장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미국이 ‘세계의 경찰’이라 불리고 그런 질서 속에서 대한민국이 전무후무한 성공담을 일궈온 지난 80여 년간이 언젠가는 무참히 깨지고 말 불안한 꿈이었던 것처럼만 느껴진다. 놀라울 정도로 평정심을 유지하는 가운데 저자는 지금 우리가 바로 이 ‘꿈이 깨지는’ 순간을 살고 있다고 결론 내린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다음 같은 정책 조언을 덧붙인다.

“이러한 격동기에 우리는 ‘각주구검’의 고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명청 교체기나 구한말에 비유할 만한 근본적인 시대 변화가 현 역사 국면에서 발생하고 있음을 인지한다면, 그간 당연시되었던 한국 외교의 정책 패러다임이 더 이상 현실적인 해법이 되지 못할 수 있음을 깨닫고, 그 전제와 가정 전반을 재고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건국 이후 사실상 전 기간 대한민국은 미국의 압도적 현존과 패권질서를 디폴트로 삼아 외교정책을 구사해왔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러한 기본 조건이 거의 사라진 환경에서 전면적으로 재검토된 국가전략 패러다임을 생산해내야만 하는 산고의 시간이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30년의 위기> 384-385쪽)

▲ <30년의 위기 : 탈단극 시대 미국과 세계질서>(차태서 지음) ⓒ성균관대학교출판부

“겨울이 오고 있다”

재작년 2월 러시아 정규군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전쟁 원인을 오로지 미국과 나토에만 돌리면서 푸틴 정부가 다극시대를 열어 젖혔다고 경축한 이들이 있다. 이들에게 미국 주도 단극시대는 소련이라는 호적수조차 없이 미국의 제국주의가 세상을 망가뜨리기만 하던 시대였다. 지금도 그 제국주의가 이스라엘의 학살 행위에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고 있으니, 이런 시각이 영 그릇되었다고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막상 단극시대가 끝났다는 사실이 분명해질수록 뚜렷이 드러나는 또 다른 진실도 있다. 그것은 미국 주도 단극체제(혹은 얄타체제?) 덕분에 이 험한 세상에서 주권국가, 국민국가를 유지하는 비용이 전례 없이 낮은 수준을 유지했다는 사실이다. 실은 세상이 국민국가들로 가득 차게 된 것 자체가 세계사상 이 시대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런 국민국가들(신생국이 더 많은) 중 상당수는 단극체제 덕분에 상대적으로 적은 안보 비용(제1차 세계대전 이전 독립국들에 비하면 확실히 그러한)만 지불하며 독립을 구가하고 전쟁을 피하며 경제성장을 추구했다. 그 중에 대한민국도 있었다.

이제 이런 시대가 끝나간다는 이야기는 곧 이 행성 한 귀퉁이에서 국민국가를 꾸려가는 데 드는 비용이 급상승할 것이라는 소식이기도 하다. 이것이 국내 민주주의의 유지와 사회권 보장, 기후급변 등 복합위기 대응에 어떤 재정적 압박과 정치적 긴장, 문화적 반작용을 야기할지 지금으로선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다극화’를 손뼉 치며 환영만 할 수 없는 이유다. 행성은 인간의 업보로 뜨거워지기만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속에서 살아남아야 할 인간들 사이에는 “겨울이 오고 있다.”

그렇다고 떠나가는 단극시대의 바짓가랑이를 잡는 것으로 살 길을 열 수는 없다. <30년의 위기>는 왜 그런지를 차분히 설명해준다. 반대로, 미지의 것 투성이인 새 시대를 앞에 두고 ‘중립’이나 ‘새로운 동맹’ 같은 말을 가볍게 꺼내는 것 역시 답이 될 수는 없다. <30년의 위기>가 권하는 현실주의가 너무 차갑고 공허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 두 극단적 태도로부터는 벗어나고 보자는 내용으로 받아들인다면 더 없이 실질적인 충고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 정부는 지난 2년 동안 바로 이 낡은 극단적 태도 중 하나로 온 나라를 밀어 넣고 있다. 어쩌면 이 어리석은 선택이 불러오고 말 재앙을 앞당길 변수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선도 아니고, 대만해협의 긴장도 아니라, 올 한 해 미국 안에서 벌어질 정치적 격동일지 모르겠다.

CP-2023-0188@fastview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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