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에서 확산하고 있는 적정 중립금리 관련 논쟁이 한국으로 번질 전망이다. 한국은행이 중립금리를 주제로 한 세미나를 개최하면서 학계와 전문가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어서다. 중립금리는 기준금리 결정의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금리 인하 가능성을 가늠해볼 수 있는 지표다.
23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오는 30일부터 31일까지 개최되는 BOK 컨퍼런스는 중립금리를 주제로 열릴 예정이다. 첫째날에는 통화정책 분야 전문가이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토머스 사전트 뉴욕대 경제학과 교수를 초청해 중립금리의 결정요인을 논의하고, 둘째날에는 한국의 중립금리에 대한 특별 세션이 열린다.
◇ 한은, 5월 말 BOK 컨퍼런스 개최… 중립금리 낮출까
이번 행사에서는 한은이 한국의 중립금리 수준을 발표할지가 주목된다. 중립금리란 경제가 과열되거나 침체되지 않고 잠재적인 성장률을 달성하도록 하는 이론적인 금리 수준을 말한다. 기준금리가 중립금리보다 낮으면 경기가 확장되면서 인플레이션을 자극하고, 그 반대라면 경기가 위축되면서 디플레이션 우려가 커진다.
중립금리는 기준금리 산출의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1993년 미국의 경제학자 존 테일러는 명목 중립금리를 기초 체력으로 보고, 물가와 성장률이 물가 목표와 잠재 수준에서 벗어난 정도에 따라 적정 기준금리를 계산하는 산식인 ‘테일러 준칙’을 제안했다. 이후 여러 변형이 생겨났지만 중립금리를 기반으로 기준금리를 산출한다는 틀은 유지됐다.
그간 시장에서는 한국의 명목 중립금리를 현재 기준금리(3.5%)보다 1%포인트 낮은 2.5%로 추정해왔다. 그러나 최근 중립금리가 더 내려갈 수 있다는 주장이 거세지고 있다. 인구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인한 저성장 압력이 크다는 이유에서다. 고령화와 저출산은 잠재성장률, 즉 노동이나 자본 등 자원을 최대로 활용했을 때 달성 가능한 성장률을 낮추고 중립금리도 끌어내리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창용 한은 총재도 수 차례 비슷한 견해를 밝혀왔다. 그는 작년 11월 한은과 세계은행(WB)이 공동 개최한 서울 포럼에서 “고물가 시기가 지나면 중립금리가 하향 추세에 접어들 것”으로 예상한 바 있다. 올해 2월 서울대에서 열린 ‘한국경제학회 공동학술대회’ 만찬사에서도 “인구구조 변화 등 대내요인 때문에 중립금리가 장기적으로 하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중립금리가 종전 예상치보다 낮다면 시장의 금리 인하 기대감은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기초체력으로 버틸 수 있는 금리 수준이 낮아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상호 한국경제연구원 경제산업본부장은 “미국의 통화정책 등 대외요건을 감안해야겠지만, 중립금리가 낮아지면 기준금리 인하 압력은 거세질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최종 금리 수준에 대한 시장의 전망도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피치와 스탠다드앤드푸어스(S&P) 등 신용평가사를 비롯한 다양한 전망기관들이 한국의 최종금리를 중립금리와 동일한 2.5%로 보고 있다. 중립금리가 변하면 이 기관도 전망을 조정할 가능성이 있다. 조용구 신영증권 연구원은 “중립금리는 적정 기준금리의 기준점 역할을 한다”면서 “중립금리에 따라 한은의 기준금리 상·하방 운용 폭을 가늠할 수 있다”고 했다.
◇ “중립금리 내려도 통화정책에 영향 없을 것” 반론도
그러나 중립금리가 내리더라도 단기적으로는 통화정책에 영향을 주기 어렵다는 반론도 있다. 기준금리 결정에는 중립금리 외에도 잠재 성장률이나 물가 수준 등 여러 지표가 반영되는 데다, 각 지표를 추정하는 방법도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테일러 준칙 등 다양한 기준금리 산식에 여러 경로로 산출된 지표를 넣으면 적정 금리 수준은 수십개로 나뉠 수 있다.
예컨대 클리브랜드 연방준비은행은 적정 기준금리를 추정하는 과정에 테일러 준칙을 포함해 7가지 법칙을 참고한다. 그런데 이 법칙에 들어가는 경제 전망치는 시장 전문가 조사와 의회예산국(CBO) 전망, 클리블랜드 연은 모형 등 3가지 방법으로 구한다. 7개의 법칙에 3가지 전망치를 각각 대입하면 적정 기준금리는 21개가 도출된다. 내년 1월 전망치 기준으로는 2.53%에서 9.13%까지 편차가 상당하다.
우리나라처럼 대외변수에 취약한 국가에서는 중립금리 외에도 참고해야 할 변수가 많다. 현재 3%포인트인 한·미 금리차(상단 기준, 한국 3.5%·미국 5.5%)도 그 중 하나다. 지금처럼 미국 경제가 호조를 보이면서 강(强)달러 흐름이 유지되는 상황에서는 기준금리를 섣불리 낮췄다가 자본유출을 유도해 금융안정성을 훼손시킬 수 있다. 환율이나 유가도 중요한 변수다.
한은 관계자는 “전세계 중앙은행 중에서 테일러 준칙 등 법칙들을 그대로 따르는 곳은 없다”면서 “국가별로 기준금리를 도출하는 산식도 다르고 사용하는 변수도 제각각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한은에서도 준칙에서 도출된 적정금리는 참고사항으로 활용할 뿐, 실제 금리는 금융통화위원회 위원들이 정한다”고 덧붙였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문가는 “중립금리가 단기적으로는 통화정책에 영향을 주지 못하더라도, 시장의 기대나 환율 등 지표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추정치를 공개하지 않는 중앙은행들도 있다”면서 “한은이 만약 이번 세미나에서 중립금리 수준을 발표한다면, 향후 통화정책 방향에 중립금리를 반영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돼 적정 기준금리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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