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5월 11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50대 중반 독일 남성이 몸싸움 끝에 이스라엘의 정보 조직 요원들에게 체포됐다. 며칠 후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다비드 벤구리온 총리가 이 사실을 직접 발표했다. 아르헨티나 정부가 강력 반발했지만 이스라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후 ‘세기의 재판’으로 불리는 예루살렘 재판이 진행됐다. 암살 우려 때문에 피고석에는 방탄 부스까지 설치됐다.
압송된 주인공의 이름은 아돌프 아이히만. 전 세계에서 112명의 증인이 소환됐다. 기드온 하우스너 검사는 아이히만을 반인도 범죄와 전쟁범죄 등 15개의 혐의로 기소하면서 “피고석에 앉아 있는 사람은 개인이 아니라 나치 정권과 반유대주의”라고 선언했다.
권력 서열에서 아이히만은 아돌프 히틀러나 헤르만 괴링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치 사냥꾼의 추적 목록 최상단에 있었다. 1933년 친위대 산하의 제국보안국에 들어간 아이히만은 유대인 전문가로서 입지를 탄탄하게 다져갔다. 그는 팔레스타인과 빈, 프라하와 부다페스트를 오가며 유대인의 강제 이송과 학살을 진두지휘했다. 1942년 1월 베를린 교외의 반제 호수 빌라에서 유대인 학살을 위한 차관회의가 열렸을 때 회의록 작성을 담당한 것도 그였다.
역사가들은 그가 아니었다면 1944년 여름 아우슈비츠로 강제 이송돼 희생된 헝가리 유대인 44만 명의 운명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한다. 그런 인물이 예루살렘 재판에서는 자신을 거대한 기계장치의 나사 바퀴에 비유했다. 뉴요커 특파원으로 재판 과정에 참관한 해나 아렌트는 일개 공무원으로서 국가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을 뿐이라는 그의 무죄 주장에 충격을 받아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창안해냈다. 아이히만의 변론은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스라엘 법정은 1961년 12월 그에게 교수형을 선고했고 1962년 5월 대법원은 그의 항소를 기각했다. 같은 달 31일 사형 집행이 시작됐고 다음 날 새벽에 사망이 확인됐다.
|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