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스트 정치인 전성시대
선거 승리가 곧 정의라는 신조
특검을 요술봉처럼 휘두르며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미국에 가 본 일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바빠서 안 갔다고 했다. 노동위를 했는데 미국 갈 일이 있느냐. 미국 안 갔다고 반미주의자냐. 또 반미주의자면 어떠냐.”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한국 다녀가서 미국 대통령이 됐느냐.”
2002년 9월 11일 대구 영남대에서 열린 ‘한국 정치 현실과 개혁 과제’ 강연에서 노무현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는 이렇게 기염을 토했다.
그는 2006년 12월 21일 서울 워커힐에서 열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제50차 상임위원회 자리에서 전시작전통제권 회수 문제와 관련, 전직 국방부 장관. 전직 참모총장 등을 무섭게 몰아붙였다.
포퓰리스트 정치인 전성시대
“작통권(전시작전통제권)을 돌려받으면 우리 한국군도 잘한다. 미국 바짓가랭이(바짓가랑이) 매달려 가지고 응디(엉덩이)…미국 응디 뒤에서 숨어가지고 ‘형님, 형님, 형님 빽만 믿겠다’, 이게 자주 국가 국민들의 안보 의식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그는 끝까지 반미정책을 노골적으로 입안·추진하지는 않았다. 한미FTA, 한국군 이라크 파병과 관련해서는 좌파 정치세력의 집요한 반대에 맞서 기어이 이를 성사시키는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결단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안 간 것을 자랑하듯 했던 미국에도 여러 차례 다녀왔다(비록 거기서 북한 역성을 드느라 바빴지만). 자녀들을 일정 기간 미국에 보내놓기도 했다.
좌파가 자녀들을 미국으로 보내 유학하게 하거나 직장생활을 하게 하는 것은 이념과 행동의 박리현상 같은 것이겠는데 이들이 그걸 부담스러워한다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미국을 비난하면서도 자식들은 열심히 미국에 보내는 이들이야말로 현실주의자들이다. 그런데도 이념을 떠받들고, 그걸 무기로 우파를 공격해대는 모습을 보면 그 안면몰수 정신세계가 신기하고 그 강심장이 부럽기까지 하다.
좌파 정치인들(일부)의 미국에 대한 인식과 태도는 ‘해리성 정체성 장애’(한 사람 안에 둘 이상의 각기 다른 정체감을 지닌 인격이 존재하여 행동에 전적인 영향을 끼치는 정신 질환)를 연상케도 한다. 개인의 경우만이 아니다. 정치세력의 집단적 정치의식도 유사하다. 미국을 공격하고, 미국에 대드는 것으로 점수를 따려고 하는 좌파 정당이나 정치세력이 미국 포퓰리스트 정치인 따라 하기에 여념이 없다.
포퓰리스트 정치인으로서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는 남의 눈치를 보거나 남의 평판에 구애되는 사람이 아니다. 대중의 심리를 파고드는 특별한 화술로 무장했다. 진실이나 거짓이냐는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가 중요할 뿐이다. 그의 말은 간단명료하고 단호하다. 논리성 합리성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런 화술이 대중의 환호를 끌어낸다. 정적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부추기는 재주도 탁월하다.
선거 승리가 곧 정의라는 신조
미국 정치의 전통이나 미덕은 그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한다. 그는 거짓말이든 탈법적 행동이든 지지 대중의 박수를 받을 수 있는 일이라면 주저하지 않는다. 정적 ‘악마 만들기’에도 거침이 없다. 온갖 범죄혐의(그것도 지저분한)에 발목 잡힌 형국이 되어 있지만 그는 그것 때문에 기죽을 사람이 아니다.
지난달 30일 그는 뉴욕 맨해튼 형사법원의 재판에서 ‘성 추문 입막음’ 의혹 관련 혐의 34건에 대해 모두 유죄 평결받았다. 미국의 전직 대통령이 형사사건에서 유죄 평결받기는 그가 처음이다. 일찍이 그런 전직 대통령은 없었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도 트럼프는 당당하다.
“부패한 판사가 조작한 재판이었다. 국민들에 의한 진짜 판결은 11월 대선에서 나올 것이다.”
미국 공화당 내에서 그를 제치고 대선 후보직을 차지할 사람은 없다. 11월의 본선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과 겨루게 되는데 트럼프가 더 유력하다고 알려진 상황이다. 차기 미국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주자가 ‘당선이 곧 정의’라는 인식을 공공연히 떠들고 나서는 미국의 정치 상황이 황당하다. 옛날에는 가장 모범적인 민주국가로 우리가 선망했던 그 나라의 정치풍토가 이렇게 변하다니!
그런데 우리나라의 좌파 정당과 그 리더가 트럼프식 포퓰리즘 정치의 충실한 제자 행세하는 기이한 현상이 한국 정치의 일상이 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만큼 다양한 범죄혐의로 여러 재판정에 불려 다닌 정치인은 일찍이 없었다. 무슨 정치적 소신이나 이념 같은 것 때문이 아니다. 개인적 부패‧비리 등의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받으면서도 부끄러워하는 빛이 없다. 아직 판결이 난 재판이 없어서 그렇겠지만 트럼프와는 달리 그는 검찰을 집요하게 공격한다. ‘검찰공화국’ ‘검사독재’ ‘정치탄압’ 운운하면서….
그는 사실 트럼프보다 더 유리한 입장에 있다. 미국 공화당과는 달리 한국의 민주당은 압도적 의석을 가졌다. 입법에 관한 한 민주당은 무소불위다. 미 공화당은 우파, 한국 민주당은 좌파인데도 그 리더의 정치행태가 어쩌면 이처럼 흡사할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다. 이 대표는 특검이라는 무기도 갖고 있다. 이 제도는 정작 원적지인 미국에서는 폐지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의회가 특별검사법에 근거해 법무부 장관에게 임명제청을 요구할 수 있는 제도는 없어졌고 법무부 장관의 권한에 기초해 임명되는 특검제도만이 남아 있다.
특검을 요술봉처럼 휘두르며
반면 우리의 거대 야당은 특검제도를 요술봉처럼 휘두르며 정부를 위협한다. 그 법을 어떻게 만들지에 대한 권한은 거의 전적으로 민주당 이 대표에게 부여돼 있다. 민주당이 1인 지배정당화 했기 때문이다. 오는 7일로 예정된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 사건과 관련, 민주당은 3일 ‘대북송금 검찰조작 특검법’을 발의했다. 만약 이 전 부지사에게 유죄가 선고되면 공소장에 공범으로 적시된 이 대표가 궁지에 몰리게 되니까 이를 막기 위해 특검제도를 동원하겠다는 것이다.
민주당의 이재명 방탄 기법은 날로 진화하고 있다. 이 전 부지사 측은 ‘검찰의 회유 압박’을 주장하며 김성태 전 쌍방울 그룹 회장 등 공범들에 대한 22개월 치 구치소 출정 기록을 모두 내놓으라고 요구하는가 하면 증인을 추가로 신청하기도 했다. 판결을 가능한 한 늦추면서 이 대표에 대한 ‘공범 족쇄’를 풀어내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시간을 최대한 끌면서 검찰과 법원을 거대정당 지배자의 위력으로 눌러 버리겠다는 계산도 물론 할 법하다.
트럼프의 아류 이재명이 대선 승리로 모든 사법적 족쇄를 다 풀어버리는 일이 생기면 그게 바로 법치주의의 위기다. 권위주의 시대로의 회귀가 현실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독재자의 길을 국민이 닦아주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우리가 중우정치, 폭민정치의 와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없어 더 절망스럽다.
“히틀러 정권의 재무부 장관이었던 루츠 슈베린 폰 크로지크(Lutz Schwerin von Krosigk) 백작은 ‘그는 가장 친한 친구에게조차 정직하지 않았다.……내 생각에 그는 거짓말이 너무 몸에 배어서 거짓과 진실의 차이를 더는 깨달을 수 없었다’라고 평가했다”(벤저민 카터 헷, 히틀러를 선택한 나라, 이선주 역),
“평범한 사람은 복잡한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굳이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보통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들어가려면 메시지가 간단해야 한다. 지적이지 않고 감정적이어야 한다(증오심이 잘 먹힌다). 그리고 끊임없이 반복해서 말해야 한다는 게 히틀러의 생각이었다”(위의 글).
중우, 폭민의 속성과 양상을 히틀러가 제대로 꿰뚫고 있었던 거다.
글/ 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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