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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착하고 성실한 친구였는데….”
우리은행 700억원대 횡령 사건의 주인공인 A씨를 두고 내부 직원들의 평가는 일관됐다. 그를 아는 직원들은 모두 A씨를 수백억원의 횡령 사건을 일으킬 범인으로 추측조차 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A씨가 두 번째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A씨는 2012년 기업개선부에서 173억원을 횡령한데 이어 3년 후인 2015년 9월, 첫 번째 횡령 수법보다 더 주도면밀하게 두 번째 횡령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A씨는 상급자들에게 대우일렉트로닉스 계약금이 예치돼있던 계좌에서 일부인 148억원을 다른 계좌에 예치해야 한다며 허위보고했다. 이후 상급자가 재예치 관련 보고서를 A씨로부터 받았지만 허위 사문서였다. 이 과정에서 사실 확인을 위한 과정은 생략됐다.
첫 번째 사문서 조작에 대해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A씨는 이후 금융위원회 위원장 명의 서명을 위조하며 공문서까지 조작, 다른 부서로 인사발령 없이 기업개선부에서 계속 근무할 수 있었다. ‘금융위와 비공식 TFT를 운영하고 있는 A씨가 2급 기밀 취급인가자’라면서 ‘사건 동결때까지 인사이동 없이 협조해라’는 내용으로 허위 공문서를 작성했다. 인사팀을 통해서가 아닌 A씨가 직접 금융위에서 받았다는 이 금융당국의 공문서에 우리은행은 속았다. 동일부서에서 일정 기간 근무하지 않도록 했던 은행내 인사 제도도 발동하지 않았다. 우리은행에서 700억원대 횡령 사건이 일어나게 된 가장 큰 배경에는 내부에서 A씨가 내민 공문서와 사문서를 의심했던 우리은행직원도, 사실 확인 절차도 없었다는 데에 있었다. 이는 은행권에서 우리은행 횡령 사건을 두고 가장 의아하게 봤던 부분이다. 전문가는 국내 시중은행에서 내부 직원에 대한 감시는 물론 거액의 입출금 거래가 이뤄지는데도 본점 이상거래 모니터링에서 잡지 못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18일 금융권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우리은행 기업개선부 과장(심사역) 으로 근무했던 A씨는 2015년 9월 두 번째 횡령 범죄를 자행했다. 이와 관련해 금감원은 이미 제재심의위원회를 열고 사고자인 A씨와 관련 상급자들에 대한 제재를 마쳤다. 금감원 제재에서 A씨는 면직처리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금감원이 내릴 수 있는 최고 징계 수준이다. 1차·2차 상급자들에겐 감봉 및 견책 수준을 내렸다. 다만 이 과정에서 최고경영자(CEO) 제재가 아닌 기관제재 조치를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A씨는 두번째 횡령을 벌이면서 사문서위조와 공문서위조, 위조 공문서 행사 등 중대범죄를 저질렀다. 2015년 9월, 상급자인 S씨와 T씨에게 대우일렉트로닉스 매각 관련 계약금이 보관되어 있던 계좌에서 일부인 148억원을 다른 곳으로 예치해야 한다고 허위보고했다. 이미 앞서 횡령한 자금을 사용하던 중 동생인 B씨와 공모해 해당 계좌에 있는 금액을 추가로 인출하자고 입을 맞춘 터였다. A씨는 다른 직원으로부터 해당 계좌를 보관하고 있던 기업개선부의 한 직원으로부터 통장과 도장을 받아 같은날, 본점 영업부에서 ‘신탁예치금전환’이라는 출금전표를 작성해 148억793만원 규모의 자기앞수표 1매를 출금했다. 이후 본점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B씨에게 해당 수표를 전달했다.
B씨는 타은행 퇴계로지점에서 자신 명의의 계좌에 해당 수표를 입금한다. 이 과정에서 본점의 이상거래 모니터링은 작동하지 않았다. 통상 은행에서 거액의 입출금이 발생하면 감사실내 이상거래 모니터링 대상에 포함되지만, 우리은행에선 이같은 입출금 거래가 모니터링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수백억원의 횡령 사건을 조기에 적발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셈이다.
이 외에 사고 적발 기회는 있었다. 상급자인 T씨가 해당 계좌 이체건에 대해 추가 보고를 요구했을 때다. A씨는 ‘처분신탁 및 대리사무 관련 예치금 처리의 건’이라는 문서를 작성, 148억원의 신탁 예치가 확인됐다는 허위 보고를 하는데도 성공한다. 앞서 받았던 U주식회사 대표이사 명의 문서 사본의 제목, 본문 등에 본인이 작성한 문서를 오려 붙인 누더기 문서였지만, 이 과정에서 사실을 확인한 우리은행직원은 없었다. 금감원에선 해당 상급자에게 관리 감독에 소홀했다는 책임을 물었다.
1심 판결에서 법원이 A씨가 두 번째 횡령을 좀 더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것으로 보는 이유는 두 가지다. 먼저 A씨는 1차 횡령 후에 비밀번호를 직접 지워버렸다. “다시는 횡령하지 말자는 생각에서”였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2차 횡령 범행 직전에 해당 사건 계좌의 비밀번호를 변경하기 위해 제신고, 변경, 재발급의뢰서를 작성하면서 치밀하게 범행을 준비했다.
이후 A씨는 자신이 다른 부서로 인사발령이 나 횡령 사실이 탄로 날 것을 우려해 공문서 위조 범죄를 벌였다. 2017년 7월이었다. 금융위 위원장 명의 문서 사본을 위조한 것이다.
은행 내부 인사발령을 막기 위해 금융당국이 공문을 해당 직원에게 직접 보내는 일은 없다. 금융위 관계자는 “산업은행 등 금융사들과 업무를 수행할 때 파견직을 보내달라거나, 교체해달라거나 추천해달라는 등의 인사 파견 관련 공식문서를 인사팀을 통해 보낸다”고 설명했다.
실제 금융위는 파견직에 해당하는 인사 발령 관련 문서를 검사부나 준법감시부 등을 통해 은행에 공식적으로 전달한다. 타은행들은 금융당국이 보낸 공문에 대한 사실 확인 절차를 모두 갖고 있었던데 반해, 우리은행은 이번 700억원대 횡령 사건이 드러나기 전까지 이 같은 절차도 마련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금융권 관계자는 “인사조치와 관련해 금융당국에서 직접 공문을 보내온 적은 없다”면서 “금융당국에서 파견 등에 관련한 인사 문서를 보낼 때는 인사팀이나 검사팀 등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보내고 은행에서도 자체적인 사실 점검을 하는 과정이 있다”고 전했다.
문제는 A씨가 짜집기하고 풀로 붙인 ‘누더기 공문’을 우리은행에서 단 한번의 확인 절차 없이 승인했다는 점이다. 팩트체크나 공식적인 루트 확인 등 검증 절차는 없었다. 덕분에 A씨는 우리은행 기업개선부에서 인사 이동 없이 차장(심사역)으로 근무할 수 있었다. 우리은행 측은 “당시 내부통제가 안된 것은 맞다”면서 “당국의 제재결과에 따라 (관련자들에 대한)징계 여부가 결정된다”고 말했다.
몇 번의 조기 적발 기회를 놓친 끝에, 두 형제는 2015년 9월 횡령 시점부터 2018년 6월까지 140여억원을 투자금과 사업자금 명목 등으로 소비하고 탕진하는데 성공했다.
전문가는 우리은행의 횡령 사건을 두고 내부에서 약 10년간 단 한차례의 경종이 울리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한다. 100% 완벽한 내부통제란 것은 없지만, 이를 줄이기 위해 더 많은 확인의 절차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과거 씨티은행에 근무한 경험이 있는 서기수 서경대 경영학 교수는 “기본적으로 모든 사고의 공통점은 사고자가 순환근무제에서 빠진 것”이라면서 “심지어 금융위 공문서에 당국 담당자 이름과 연락처가 명시가 되어 있을텐데도 부서장이 전화해서 한 번이라도 확인했더라면 이런 일이 있었을까 싶다”고 말했다. 이어 “20년전에도 공문 수령 대장이 있어 보관하고 승인받는 과정이 있었다”면서 “특정 기관과 주고받는 공문은 전자문서나 제도적 장치가 필요한데, 이런 부분을 사적으로 주고받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감사실에서도 실시간 주식 시세 차트처럼 어느 지점에서 얼마의 거래가 일어나고 있다고 모니터에 뜨는데 이걸 못잡았다는 것은 이해가 안된다”고 덧붙였다.
금감원도 지난해 우리은행 조사에서 공문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은행의 대외 수·발신 공문에 대한 내부공람과 전산등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이를 은폐하거나 위조가 가능했던 원인이 됐다고 봤다. 직인날인 관리도 허술했다. 결재문서에는 141억원을 타기관 예치한다고 했지만 출금전표에는 148억원이 적혀있었다. 결재문서와 내용이 달랐지만 그대로 직인이 날인돼 횡령사고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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