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투자시장이 꿈틀대고 있다. 지난해부터 얼어붙었던 투자 심리를 풀어줄 만한 소식이 간간히 들려온다. 내년 모태펀드 예산이 예년 수준으로 증액 편성된 것은 물론 8000억원 상당의 국내 최대 규모 단일 벤처펀드가 결성되는 등 희소식이 들린다.
물론 본격적인 벤처투자 회복을 논할 단계는 아니다. 여전히 많은 벤처캐피털(VC)은 그간 지나치게 높아진 기업가치가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며 쉽사리 투자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있다. 일부 대형 벤처캐피털(VC)이 아닌 다음에야 신규 펀드 출자금을 확보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2021~2022년에 걸친 벤처투자 열기와 이윽고 찾아 온 추운 겨울은 벤처투자 생태계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대기업·중견기업·중소기업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개방형 혁신을 외치며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털(CVC)을 설립했고, 금융권에서도 일제히 벤처투자를 새로운 투자영역으로 삼아 자회사를 차렸다.
벤처캐피탈협회 산하에 CVC협의회가 19일 설립된 것도 달라진 벤처투자 생태계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다. 정부도 이날 2027년까지 CVC 벤처투자 비중을 30% 이상이 될 수 있도록 한다는 목표를 제시하며 지원 의지를 내비쳤다. 이제 더 이상 전략적투자자(SI)와 재무적투자자(FI), 위탁운용사라는 전통적인 역할 구분도 무색한 일이 됐다.
출자기관(LP)도 추운 겨울에 걸맞게 새 옷을 입고 있다. 정책금융기관 주도로 2013년 출범한 성장사다리펀드는 지난달 출범 10년을 맞아 개편 방안을 발표했다. 기존 성장사다리펀드 운용기관이 아닌 다른 기관에서 펀드 운용을 맡을 수 있다는 가능성도 덧붙였다. 민간과의 중복을 줄이고 차별성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다.
벤처투자 생태계 전반에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벤처투자 생태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아 온 모태펀드는 여전히 제자리다. 최근 발표한 ‘벤처투자 활력제고 방안’에도 이런 고민은 크게 보이지 않는다. 출자분야와 재원 배분을 업계와 사전 논의하고 루키리그를 확대해달라는 시장의 요구가 받아들여진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민간모펀드 출범을 앞두고 재정모펀드 역할을 다시 정립해야하는 지금 상황에서도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없어 보인다. 모태펀드 운용과 출자에 전문성을 갖춰야 할 한국벤처투자 부대표 자리에 관련 경험이 전무한 인사가 자리했을 정도다. 차라리 이럴 바에야 민간에 모태펀드 운용을 맡기는게 나을 수도 있다. 출범 당시 벤치마킹했던 요즈마펀드 사례를 다시 한 번 살펴야 할 때다.
류근일 기자 ryuryu@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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