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 29주기를 맞은 서울 성수대교. /사진=남형도 기자 |
“우지직 꽝”
1994년 10월21일. 112와 119에 이른 아침부터 성수대교가 무너졌다는 전화가 몰렸다. 장난 전화로 여긴 경찰과 소방 당국은 무시로 일관했지만, 오전 8시20분까지 같은 내용의 전화가 빗발치자 뒤늦게 헬기를 띄웠다. 이날 아침 7시40분쯤 성수대교가 무너져내린 지 40여분이나 지나서였다.
출근 시간 갑작스럽게 무너진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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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뉴스1 DB |
서울 강남과 강북을 잇는 성수대교는 교량 중앙인 10~11번 교각이 밑으로 무너지면서 붕괴했다. 이 사고로 다리에 있던 시내버스를 포함해 차량 6대가 추락했으며, 32명이 숨지고 17명이 부상했다.
사상자 대부분 추락한 시내버스에서 나왔다. 이 버스는 무너진 교량에 반쯤 걸쳐있다가 뒤집힌 채 추락해 피해가 컸다.
희생자는 주로 직장인과 교사, 학생이었다. 사고 시간이 출근 및 등교 시간과 겹쳐서다. 특히 무학여중·고교생만 9명 숨져 가장 피해가 컸다.
학생들은 당시 강남에 거주했는데, 성동구에 있는 학교까지 통학하다 변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시교육청은 이후 강남·북 학생의 교차 지원을 금지했다.
예고된 人災…총체적 난국이었던 성수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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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뉴스1 DB |
성수대교는 1977년 4월 착공해 2년 반 만인 1979년 10월16일 개통됐다.
서울 한강에 새로운 랜드마크를 마련하고 싶었던 시공사 동아건설은 다리의 기능보다 미관에 집중했다. 기존의 공법을 벗어나 국내 최초로 게르버 트러스 공법을 채택해 교각 간 간격이 넓고 시원스러운 느낌을 줬다.
다만 트러스 공법에도 단점은 있었다. 미관을 강조하다 보니 통행량이 많아지고 이음새에 문제가 생기면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
더구나 동아건설은 부실 시공으로 사고의 단초를 제공했다. 서울지방검찰청에서 발간한 ‘성수대교 붕괴 사건 원인규명감정단 활동백서’에 따르면 당시 다리는 심하게 녹슬어 있었고, 각 철재를 잇고 압력을 분산시키는 상판의 이음새에도 결함이 있었다.
아울러 공사 도중 볼트 등을 무리하게 삽입해 구멍이 변형되면서 손으로 풀 수 있을 만큼 강도도 약화됐다.
서울시의 안일한 관리도 사고를 키웠다. 당시 시는 사고 두 달 전 다리에 발생한 균열을 확인했지만, 큰 철판을 덧댔을 뿐 제대로 보수하지 않았다. 이음새가 벌어지고 있다는 신고도 두 차례나 들어왔는데 아무런 대응을 취하지 않았다.
안전 점검 역시 소홀했다. 20년 이상 된 교량만 검사하다 보니 사고 당시 15년 된 성수대교에 대해서는 육안검사가 전부였다.
경찰·소방 당국도 화살을 피하지 못했다. 믿을 수 없는 사고였지만, 늑장 대응으로 사상자의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지적이 빗발쳤다.
책임자 모두 솜방망이 처벌,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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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수대교에서 시 관계자들이 교각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뉴스1 DB |
당시 관선 시장이던 이원종 서울시장은 문책성 경질됐다. 후임으로 온 우명규 시장 역시 성수대교 건설 당시 책임자였던 것으로 드러나 임명 11일 만에 자진 사퇴했다. 이영덕 국무총리도 사고 당일 사의를 표명해 같은 해 12월 물러났다.
동아건설과 서울시 관련자 등 17명은 업무상 과실치사죄 등으로 기소됐다. 그런데 당시에는 설계·시공사에 책임을 묻는 법규가 없어 1심에서 무죄와 집행유예 등이 선고됐다.
대법원은 1997년 11월 “업무상과실치사상등죄에 대해 형법 제30조 소정의 공동정범의 관계가 성립된다고 봐야 한다”며 ‘과실범의 공동정범’을 근거로 처벌했지만, 수위가 높지는 않았다.
동아건설 현장소장, 서울시 동부건설사업소장에 각 금고 2년, 금고 1년 6월형이, 서울시 공사감독관 등 나머지 피고인에게는 금고 1~3년형 또는 징역 10월~1년 6월에 집행유예 1~5년형이 확정됐다.
국회는 뒤늦게 1995년 1월 ‘시설물안전관리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했다. 이 법에서는 부실설계 및 감리자에 대해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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