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그 자체로 책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단숨에 독자의 마음에 가닿아 책과의 접점을 만드는 문장이 있습니다. 책에서 그런 유의미한 문장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시인 이해인 수녀가 작은 위로가 필요한 아픈 이들을 위해 쓴 시집이다. ‘서로 사랑하면 언제라도 봄’ 이후 8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 시집이다. 1부와 2부는 투병 중에도 나날이 써낸 신작 시를 엮었다. 시인은 말한다. “이 시집의 제목을 ‘햇빛 일기’라고 한 것은 햇빛이야말로 생명과 희망의 상징이며 특히 아픈 이들에겐 햇빛 한줄기가 주는 기쁨이 너무도 크기 때문입니다.”
복도를 걸어갈 때도
두꺼운 유리창을 뚫고 들어와
나를
생명의 빛으로 초대하는
나의 햇빛 한줄기로
나는 하루를
시작한다
– 「햇빛 주사」 중에서
생각의 빗방울이 많아지고
어딘가에 깊이 숨어 있던
고운 언어들이
한꺼번에 빗줄기로 쏟아져 나와
나는 감당을 못 하겠네
기쁘다
행복하다
즐겁다
나는 그냥
하루 종일 웃으며
비를 맞고 싶을 뿐
– 「비 오는 날」 중에서
슬픈 사람들에겐
너무 큰 소리로 말하지 말아요
마음의 말을 은은한 빛깔로 만들어
눈으로 전하고
가끔은 손잡아주고
들키지 않게 꾸준히 기도해주어요
– 「슬픈 사람들에겐」 중에서
산다는 게 언제나
끝없는 그리움이어서
그러나 실은
언젠가는 꼭
끝나게 될 그리움이어서
그래서 눈물이 난 것이라고
– 「바다 일기」 중에서
지금껏 나는 얼마나 많은 이름을 부르며
살아왔는지 얼마나 많이
이름이 불리워지며 살아오고 살아냈는지
고맙고 고마워서
자꾸만 눈물이 난다
내가 아는 이름들을 향해
무조건 사랑한다며
가만히 목례를 한다
– 「이름 부르기」 중에서
새롭게 만나는
시간의 결을
조심조심
맑고 곱게
가꾸어가야겠다
그리고
기도의 지향을
단순하게 정해야겠다
오늘은
이 결심만으로도
충분하고 충분하다
– 「작은 결심」 중에서
어느 훗날 나는
존재 자체로 한 장의 카드가 되어
날아갈 준비를 하네
더 이상
가게에서 사지 않아도 될
가장 아름다운 카드 한 장으로
나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또 내일도
그냥 그냥 기뻤다고 고백하리라
한 장의 러브레터로 살다 갔다고
누군가 그렇게 기억해주길 바란다고!
– 「꿈 일기―카드를 사며」 중에서
이해인의 햇빛 일기 | 이해인 지음 | 열림원 | 264쪽 | 1만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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