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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기금 규모 270억 달러(35조 원)는 분명 큰돈이지만 매사추세츠공대(MIT)가 직면한 핵융합 연구 과제에 비하면 작게 느껴집니다.”(세스 알렉산더 MIT 투자관리회사 회장)
세계 최고의 공대로 꼽히는 MIT는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과 유에스뉴스앤드월드리포트 랭킹이 꼽은 2024년 대학 순위에서 영국 옥스퍼드와 미국 프린스턴대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MIT의 관심은 핵융합 연구에 쏠려 있다. MIT 과학자들은 고온 초전도 자석을 사용한 핵융합으로 핵폐기물 없는 원자력발전소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시연하고 있다. MIT의 핵융합 연구 조직에서 분사한 스타트업인 커먼웰스퓨전시스템은 MIT 플라스마 과학 및 융합센터와 손잡고 2월 핵융합 에너지 장치인 스팍(SPARC)을 구축하기 위한 시설을 만들었다. 개관식에는 제니퍼 그랜홈 미국 에너지부 장관을 포함한 미 정부 고위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MIT는 2021년 9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자기장을 형성하는 초전도 자석을 만들었고 2025년까지 실제 작동하는 핵융합로를 만들 계획이다. 이는 핵 연구의 세계적 선진국인 프랑스보다 10년 빠른 시간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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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에너지부는 2018년 MIT의 핵융합 에너지 연구를 정부 지원 과제로 선정했다. 하지만 정부 지원금이 전부는 아니다. MIT의 대학 기금이 핵융합 연구를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축이다. 10년 가까이 이어질 수 있는 연구가 재정 부담 없이 지속돼 성공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다. 세스 알렉산더 회장도 대학 기금운용보고서에 핵융합 연구 지원을 가장 강조했을 정도다.
실제 MIT 투자회사는 미국 사립대 중 5위권 내에 드는 35조 원의 기금을 굴려 매년 MIT 예산의 30%를 책임지고 있다. MIT 재학생과 교수진·졸업생이 핵융합뿐만 아니라 암 치료 개선과 신소재 개발, 저공해 농작물을 통한 기후변화 해법 및 로봇, 우주탐사 등에 마음 놓고 뛰어들 수 있도록 돕고 있다.
MIT는 글로벌 고금리가 본격화하며 투자 환경이 악화됐던 지난해 -5.3%의 기금 운용 손실을 기록했다. 하지만 5년 기준 수익률은 18.9%로 미 대학 평균(12.7%)보다 월등히 높다. 그 덕에 지난해 1만 명에 달하는 MIT 학부생의 37%가 등록금을 전액 지원받았다. 올해부터는 연간 14만 달러(1억 8500만 원) 이하의 소득과 자산을 지닌 가정의 학부생은 등록금이 전액 무료다. 9만 달러 이하에서 문턱을 더 낮춰 사실상 중산층에 해당하는 학생도 MIT에 입학만 하면 돈 걱정 없이 공부하고 연구할 수 있게 된다. 이는 96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MIT 경쟁력의 근원이기도 하다.
미 동부에 MIT가 있다면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에 위치해 미 서부를 대표하는 캘리포니아공대(칼텍)도 연구개발(R&D) 강화와 학생 지원 확대에 든든한 대학 기금이 버티고 있다. 칼텍은 지난해 대학 기금 수익 2200억 원 중 38%(약 827억 원)를 순수하게 학문 연구 지원에 투입했다. 경쟁력 있는 교수진과 좋은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한 급여와 장학금(528억 원), 특정 연구 프로젝트를 이끄는 교수에게 주는 지원금(457억 원)까지 더하면 무려 82.6%의 기금 수익금이 대학의 R&D에 직간접적으로 쓰였다.
칼텍의 R&D 중시 문화는 지금까지 졸업생과 교수 46명이 노벨상을 수상한 저력의 핵심 동력 중 하나다. 재커리 리 칼텍 지속가능성 연구원은 “기금의 튼튼한 지원이 학교의 안정적인 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기업과 달리 대학의 R&D는 산업 발전에 필수적인 원천 기술에 집중돼 있다. 원천 기술은 상용화를 고려하지 않는 측면이 있고 장기간 대규모 자금이 투입돼야 한다. 이 같은 리스크를 감수하고 칼텍이 운영하는 대학 기금은 지속적인 R&D 확대의 인프라로 자리한 셈이다.
특히 칼텍의 지속적인 R&D 투자는 일반 시민들의 호응도 이끌어내고 있다. 칼텍이 지난해 받은 기부금 1450억 원 중 절반가량이 대학 재단이나 졸업생이 아닌 일반 주민들이 낸 것이다. 높은 기금 수익을 통한 R&D 투자가 마중물이 돼 ‘대학 기술 및 경쟁력 제고→기부금 확대→R&D 투자 재확대’의 선순환이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국내 공대의 한 관계자는 “명문 이공대가 나오려면 연구 역량과 재정 지원이라는 ‘양 날개’가 필요하다”면서 “국내 공대도 연구 역량은 일정 수준에 이르렀지만 예산 부족에 시달리면서 과거 한국 공대를 배우려던 싱가포르 등 아시아 공대보다도 오히려 경쟁력이 떨어지는 추세”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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