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하게 평결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지난 17일 오전 11시10분 서울남부지법 형사합의11부(부장판사 정도성)는 1번 배심원의 선서를 시작으로 국민참여재판을 진행했다. 재판정 왼편 검찰 측 자리 옆에는 절차를 거쳐 선정된 최종 8명의 배심원 후보자들이 앉았다. 법원은 2008년부터 일반 국민에게도 배심원으로서 형사재판의 공소사실 유·무죄와 양형에 대한 판단 과정에 참여할 기회를 주고 있다. 8명 중 한 명은 재판 말미에 무작위 추첨으로 예비배심원으로 분류돼 피고인의 유·무죄와 양형에 관해 토론하는 평의 절차에서는 빠지게 된다. 예비배심원은 배심원에게 피치 못한 상황이 생기는 경우를 대비한다. 기자는 선고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12명의 ‘그림자배심원’ 중 한 명으로서 재판을 참관했다. 그림자배심원은 배심원들과 동일한 절차로 국민참여재판에 참석하지만, 방청석에서 이를 지켜보고 따로 모의 평결을 진행한다.
이날 재판정에 서게 된 피고인은 특수상해, 모욕 혐의를 받는 박모씨(38·남)였다. 검찰에 따르면 그는 지난해 9월17일 오후 6시25분 서울 영등포구 한 아파트 단지에서 오토바이를 몰다가 아내와 함께 걷고 있던 50대 남성 공모씨가 “오토바이 통행 금지구역이니 다른 곳으로 우회해달라”고 말하자 화가 나 오토바이로 공씨를 들이받은 뒤 바닥에 넘어진 공씨를 향해 욕설까지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처음 공소사실만 들었을 때는 피해자의 입장에 귀를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변호인이 제시한 영상자료를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소리가 없는 5분 남짓한 영상을 보여주며 박씨의 변호인은 “공씨를 피해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 오토바이 앞쪽으로 공씨가 다가왔고, 이에 박씨는 0.3초 만에 브레이크를 잡는 모습이 나온다”고 주장했다. 반면 검찰은 “앞에 사람이 있으면 부딪힌다는 건 예측 가능한 부분”이라며 “미필적 고의를 인정할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배심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검찰은 “‘미필적 고의’는 결과가 발생할 가능성을 확실하게 인식하진 못했더라도 충분히 예측 가능했을 때 인정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막상 영상을 봤을 때 박씨가 오른쪽으로 핸들을 트는 모습이 보여 ‘피하려 했다’는 변호인의 말에 조금 더 신뢰가 갔다. 배심원들 모두 CCTV 영상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증인·피고인신문에서는 쟁점이었던 ‘피고인의 말이 모욕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증인으로 나온 목격자는 “구체적인 욕설은 기억나지 않지만 (박씨가) ‘군대는 갔다 왔냐, 사내자식이 여자랑 귓속말한다’고 하는 등 태도가 좋지 않아 지켜봤다”고 말했다. 특히 목격자는 “들은 내용이 부당하거나 수치스러운 내용이었냐”는 재판부의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국민참여재판인 만큼 배심원이 직접 질문할 기회도 주어졌다. 한 배심원이 박씨에게 “피해자 입장에서는 기분이 어땠을 것 같은가”라고 묻자 박씨는 “(공격적인 말을) 서로 주고받는 상황이라 크게 개의치 않았을 것 같다”고 답했다. 박씨는 증인 신문 중간중간 피식 웃었다. 피고인이나 증인의 발언 내용뿐만 아니라 발언 태도도 법관의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만큼 집중해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문 절차를 마친 뒤 검찰은 박씨에게 징역 1년4개월을 선고해줄 것을 재판부에 요청했다. 박씨 측은 “특수상해는 아무리 봐도 일부러 한 것이 아니고, 모욕죄 역시 반말은 했지만 욕설은 한 적이 없다”라며 “파렴치한 죄, 무례한 죄를 묻는다면 처벌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닌 이상 처벌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후 예비배심원을 제외한 배심원 7명의 평의 절차가 진행됐다. 같은 시간 그림자배심원도 다수결로 결정해야 할 상황을 대비해 1명을 제외한 11명이 모여 모의 평결을 시작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림자배심원의 모의 평결은 선고 결과에 반영되지 않는다. 같은 증거를 봤지만, 그림자배심원마다 서로 의견이 달랐다. 기자는 “브레이크등이 켜진 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박씨가) 피하려고 핸들을 틀었기 때문에 미필적 고의도 성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특수상해 혐의에 대해 무죄 의견을 냈다. 다른 그림자배심원은 “전방에 사람이 있을 때 주행하면 부딪힐 수 있다는 것이 예상되기 때문에 미필적 고의가 인정된다고 볼 수 있다”고 반박했다.
모욕죄에 관한 토론도 벌어졌다. 기자는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욕설이 없더라도 제3자가 발언에 대해 수치심이 들 수 있었다고 말했다면 모욕이 될 수 있다”고 모욕죄 유죄를 주장했다. 그러자 또 다른 그림자배심원은 “피고인과 피해자의 진술이 갈리고 명확한 증거가 없다”고 말했다. 목격자가 심문 과정에서 피해자가 들었다고 주장한 욕설에 대해 명확히 진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의 평결 시간이 끝나갈 무렵까지도 의견이 팽팽히 갈리면서 결국 그림자배심원은 다수결로 결론을 냈다. 특수상해의 경우 전부 유죄 3명, 폭행만 인정 2명, 무죄 6명으로 다수결로 무죄를 판정했다. 모욕죄는 유죄 6명, 벌금 100만원으로 결론이 났다.
이날 실제 선고 결과도 모의 평결 결과와 비슷했다. 재판부는 모욕 혐의만 유죄로 인정, 벌금 150만원을 선고했다. 정식 배심원들도 특수상해의 경우 미필적 고의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고, 재판부도 배심원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선고가 끝난 시간은 재판이 시작된 지 9시간35분만인 오후 8시45분이었다.
그림자배심원로 참여한 기자와 마찬가지로 정식 배심원들 역시 결정에 많은 고민이 들었다고 전했다. 질문을 많이 던진 30대 여성 김모씨는 “평의가 결국 만장일치가 됐지만, 의견이 다양하게 나오긴 했다”라며 “특히 특수상해와 관련해 미필적 고의를 판단할 때 주관성이 많이 담겨 확신이 잘 서지 않았다”고 말했다. 홍모씨(28·여)는 “사건을 판단할 수 있는 증거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결정해야 해서 힘들었다”며 “남의 인생을 결정하는 일이라는 생각에 긴장도 됐다”고 말했다. 배심원들은 재판 과정을 알 수 있었던 특별한 경험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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