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은 영수회담에만 관심있다
회담 성사돼도 무한투쟁은 그대로
대통령과 여당의 관계 재정립해야
김기현 국민의힘 당 대표가 22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 ‘여야 대표 민생협치 회담’을 제의했다. 그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고위당정협의회에서 모두발언을 통해 “언제 어디서든 형식,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야당 대표와 만나겠다”고 밝혔다. 여당 대표가 ‘민생’과 ‘협치’를 강조한 것은 반가운 일이다. 한덕수 총리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과 함께 김대기 대통령 비서실장, 이진복 정무수석 등이 참석했던 만큼 여야 대표회담 제의에는 윤석열 대통령의 뜻도 실렸다고 볼 수 있다.
이재명은 영수회담에만 관심있다
그렇지만 별로 기대할 바는 못 될 듯하다. 이 대표가 바라는 것은 윤 대통령과 자신의 ‘영수회담’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달 27일 자신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된 이틀 후 이를 제의했다. 당면의 위기를 벗어나면서 종전의 수세를 공세로 전환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고 하겠다. 게다가 지난 11일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는 민주당 후보가 국민의힘 후보를 압도했다. 기세가 오르고 있는 이 대표가 ‘윤-이 회담’을 포기하고 여야 대표회담을 받아들이려 하겠는가.
물론 윤 대통령이 이 대표의 제의를 받아들일 가능성도 희박하다. 구속영장이 기각됐다고 해서 이 대표가 피고인·피의자의 신분을 면한 것은 아니다. 그는 매주 2~3회 법원에 들락거려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이런 이 대표를 대통령이 ‘영수회담’의 명분으로 만날 수는 없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가 ‘영수(領袖)’로서 대좌한다면 이후의 검찰 수사와 재판에 대한 국민의 시각이나 평가가 달라질 지도 모른다. 이 대표의 이미지 세탁을 대통령이 돕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영수회담도, 여야 대표회담도 성사되지 못할 경우 여야 간의 극한정쟁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하긴 ‘민생’의 기치를 내걸고 회담을 한다한들 여야가 정쟁을 멈출 것도 아니다. 이 대표의 사법리스크가 해소되지 않는 한 민주당은 거대의석을 배경으로 한 정치투쟁을 계속할 게 뻔하다. 그렇다고 정부 여당이 정치적 화해를 위해 이 대표의 사법리스크를 완화시키겠다고 나설 수도 없다. 그게 우리 정당정치의 현실이다.
회담 성사돼도 무한투쟁은 그대로
내년 총선 때까지 이런 정치양상은 바뀌지 않는다. 총선 후에는 재편된 의석 구도에 따라 새로운 여야 공방의 구조가 형성될 것이다. 그때도 변하지 않을 게 있다. 대통령을 상대로 한 야당의 무한 투쟁 양상이다. 이는 우리 정치의 구조적 한계다. 대통령 중심제와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당체제의 미스매치가 해소되지 않는 한 극한대결의 정치는 계속되고 야당과 그 지지자들의 극렬저항도 멈추지 않는다.
정당정치의 이러한 조건 하에서는 영수회담이 성사된다고 해도 달라질 게 없다. 이 회담을 통해 이 대표가 얻고자 하는 바는 자신을 대통령과 동렬에 올려놓는 것이다. 차기 대선과 관련, 당내에서는 물론이고 여당 리더와의 경쟁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는 대단히 효과적인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설령 성사된다고 해도 영수회담의 성과는 한시적이고 제한적이게 마련이다.
윤 대통령은 강서구청장 보선에서 여당이 참패하자 청와대 참모들에게 ‘이념 논쟁 중단, 민생에의 집중’을 주문했다.
“국민은 늘 무조건 옳다. 어떤 비판에도 변명해선 안 된다.”
이 말은 그가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던 지를 짐작케 한다. 리더십 스타일의 대전환이다.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가치를 확고부동하게 세우는 것이 통치권자로서 대단히 중요한 책무라는 것을 부인하는 말은 아니라고 본다. 다만 민심에 수용되지 않는 ‘이념 바로 세우기’는 ‘경쟁의 정치’라는 현실적 조건에서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것 같다.
그의 말은 청와대 참모들뿐만 아니라 여당의 지도부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민생정당으로서의 면모를 뚜렷이 보이라는 주문이었다. 그게 김 대표의 민주당 이 대표에 대한 민생 회담 제의로 나타났을 것이다. 대통령이 영수회담에 응할 수는 없는 만큼 김 대표가 그 부분을 채워보라는 것이겠는데, 민주당 이 대표가 이에 응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대통령과 여당의 관계 재정립해야
대통령이 정쟁에서 벗어나고 여당 리더가 그 위상을 찾을 방법이 없지는 않다. 여당의 정치적 독립 혹은 자립을 인정하고 보장해주는 게 대통령과 여당이 상생하는 길이다. 여당 대표가 대통령실의 기류에 구애됨이 없이 정치적 결정을 내릴 수 있고, 특히 정부 각 부처의 적극적인 대 여당 협조체제가 확립될 때 야당의 대여 전략도 달라질 것이다. 여당 대표의 말발이 야당에 먹혀들면 왜곡된 정치과정이 상당 부분 개선될 수 있다(물론 대통령 중심제와 중앙집권적 정당체제라는 모순적 구조가 빚어내는 문제들의 근본적 해소는 기대할 바 못되지만).
그래서 말인데, 국민의힘은 혁신위원회 구성 원칙을 새롭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위상·역할·권한이 분명하지 않은 혁신위는 장식품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혁신안에 대해 당 최고위원회가 수용 여부를 결정하는 구조라면 그런 기구는 안 두는 게 오히려 낫다.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만 민주당 김은경 혁신위원회의 예를 돌아 볼 일이다. 진지함도 절실함도 없이 면피용으로 그런 조직을 만들 경우 국민의 비웃음을 면할 수 없다. 혁신위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고, 거기서 도출되는 혁신안을 전폭적으로 존중, 수용하겠다는 결의가 요구된다.
대통령실과의 관계에서도 역대 정권의 뼈아픈 경험을 잊지 말아야 한다. 대통령이 여당을 사실상 지배하거나 여당이 대통령에게 등을 돌리는 구조가 되면 그 정권은 망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과 여당, 여당과 대통령의 건전한 관계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고민할 때다.
서로 존중하면서 서로 협조하는, 말 그대로 상생의 관계가 형성될 때 정권은 정치 주도력을 발휘할 수 있다. 대통령이 여당에 대한 지배 욕구를 스스로 극복하지 못한 결과가 어떤 불행으로 나타났는지는 국민 모두가 지켜본 그대로다. 이는 여당이 대통령을 이기려고 압박하고 등 돌린 이른바 ‘배신의 정치’와 동전의 앞뒷면을 이뤘다. 대통령과 집권당이 공멸의 길을 걸은 것이다. 노무현 정권과 박근혜 정권이 그 전형적인 양상을 노출했었다.
국민의힘 김 대표와 지도부는 여야 대표회담 제의에 앞서 먼저 이들 과제부터 해결할 일이다.
글/ 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