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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노 칼럼] 정치권은 과연 전력시장에서 손을 뗄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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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노 교수
[이학노 교수]

  
‘위기는 곧 기회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에는 위기를 잘 헤쳐 나가면 전화위복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언젠가 다시 위기를 맞게 된다는 경고의 메시지도 담겨 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지 못하는 것은 기득권을 가진 이해관계자들이 반발해서 위기의 원인을 바로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나라의 지도자들은 개혁을 추진한다. 멕시코는 오랜 세월 동안 수입대체산업화로 집약되는 국산 장려와 보호주의 정책을 유지하였다. 1980년대 국제 이자율 급등에 따른 외채 부담 가중, 유가 폭락으로 인한 재정의 어려움, 세 자릿수 이상에 달하는 슈퍼 인플레이션 등 멕시코 경제는 엄청난 경제위기를 맞게 된다. 1988년에 대통령이 된 살리나스(Salinas)는 시장 개방과 민영화 등 개혁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기 위해 역사적 적대관계인 미국과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를 추진하게 된다. 경제 체제의 대대적 혁신을 담고 있던 NAFTA는 멕시코의 기득권 집단들은 물론 영세농(ejidos)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저항을 받으면서 추진되었다. 상반된 평가들이 있지만 NAFTA가 아니었다면 60년 이상의 국가통제주의, 일당(PRI) 독재, 경제 민족주의에 따라 누적되어온 멕시코의 경제적 왜곡을 해결하는 환골탈태의 경제 혁명을 가져 올 수 없었을 것이다.
 
한 세대도 아직 흘러가지 않은 1997년, 나라의 명운이 걸린 외환위기를 맞은 우리나라는 김대중 대통령을 새로운 지도자로 선출하였다. 김 대통령은 금융, 기업, 공공, 노동 등 4대 부문의 개혁을 추진했고 공공 부문에서는 조직개편과 인력 감축, 공기업의 민영화와 경쟁 촉진을 목표로 삼았다. 전력·가스 등 공기업 독점 분야에 경쟁체제를 도입하기로 하면서 전력산업 구조 개편이 추진되었다. 1999년 전력산업 구조개편 기본 계획은 한전이 독점하고 있던 발전·판매 부문을 경쟁 체제로 전환하겠다는 게 골자였다. 한전의 발전 부문은 원전을 담당하는 한수원과 화력발전소를 운영하는 남동, 중부, 서부, 남부, 동서 등 5개 발전 자회사로 나뉘었다. 한전이 발전자회사에서 생산된 전기를 도매로 산 뒤 기업, 가정 등에 파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동시에 전력시장과 전력계통 운영을 맡는 전력거래소도 설립됐다. 그러나 전력산업 구조 개편 작업은 여기까지였다. 한수원을 제외한 민영화 대상 5개 발전 자회사 중 맨 먼저 추진된 남동발전 매각은 노무현 정부 출범 한 달 만인 2003년 3월 최종 입찰을 앞두고 중단됐다. 판매 부문 개방을 염두에 둔 배전 분할 논의는 2004년 6월 아예 사라졌다. 노무현 정부가 한전 배전 분할을 멈추라는 노사정위원회 권고를 받아들이면서다.
 
전력산업 구조 개편은 IMF 주도의 워싱턴 컨센서스가 천편일률식으로 우리나라에 적용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에서 설계된 좋은 제도들이 여러 분야에 많았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전력산업 구조 개편은 좋은 설계들이 빛을 보지 못했거나 형식에 그쳤거나 나중에 흐지부지 되어 버린 대표적인 사례다. 전기는 사용의 편리성 등으로 에너지의 전기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전력산업 구조 개편은 우리나라 주요 에너지원들의 시장 기능 작동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다. 발전소가 민간 대기업에 넘어가면 전기요금이 오를 수 있다는 반대 주장이 지속되던 상황에서 2001년 캘리포니아에서 정전 사태가 발생하자 그동안 숨을 죽이고 있던 구조 개편 반대론자들이 민영화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전력산업 구조 개편을 중단시키게 된다. 우리로서는 위기를 복으로 만들 수 있었던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친 셈이다.
 
우리가 늘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본은 어떨까.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철옹성의 카르텔 집단으로 여겨졌던 도쿄전력을 개혁했다. 신규 사업자 진입이 허용되고 지역 간 전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광역계통운영기관이 설립되었고, 발전·송배전·판매가 분리되었으며 발전·소매의 전면 자유화, 소매요금 규제 철폐 등이 성공적으로 추진되었다. 그 결과 많은 사업자가 시장에 진입하고 경쟁의 효과로 전기요금은 인하되고 있다. 일본의 스토리라서 우리나라에서 과소평가하거나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는지 모르지만 일본은 엄청난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전력산업 개편이 멈춰 선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민영화 얘기는 금기시되고 말았다. 한전이 자기 발전 자회사의 전기를 도매로 사서 공장이나 가정에 소매로 파는 체제에서 도소매 가격의 괴리는 언제라도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전력산업 구조 개편을 중단시킨 노무현 정부 이후 오랫동안 전력 가격 결정 문제는 외면되거나 폭탄 돌리기가 되고 말았다. 이명박 정부는 에너지 가격 10% 인하에 방점을 찍었고 “에너지가격체계 조정위원회”를 운영하여 에너지 가격을 전면 재조정하겠다고 약속하였지만 실천되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는 전력·가스 시장의 독점구조로 인한 비효율과 비합리적인 전기요금 등을 바로잡기 위해 공정경쟁 체제와 에너지 요금 체계를 전면 개편하겠다고 약속하였지만 역시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는 에너지 공급 일변도를 지양하고 총 에너지 소비의 증가를 제어하는 수요관리정책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공약하였지만 전기요금 결정 체계를 제대로 정비하지 못했다. 현재의 윤석열 정부는 전력시장·요금 및 규제 거버넌스의 독립성·전문성을 강화하고 경쟁과 시장원칙에 기반한 전력시장 구축을 약속하였다. 구체적인 방안으로 시장원칙이 작동하는 투명하고 합리적인 전력 시장‧요금체계 조성을 제시하였다.
 
지금 한전의 적자 문제가 폭발 일보 직전이다. 원가를 반영하여 전기요금을 인상하여야 한다는 주장과 물가 문제 등으로 대폭 인상이 어렵다는 정부 방침이 대립하고 있고 한전 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요구도 강하다. 내년 4월 총선은 문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한전의 늘어나는 적자와 얽혀 있는 에너지 시장을 제대로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뾰족한 묘수가 없다. 전기요금부터 현실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민생 경제가 6개월 이내로 다가온 총선 승패의 관건으로 대두되고 있는 마당에 단돈 10만원이라도 선심으로 주기는커녕 유권자의 돈이 더 나가는 전기요금 인상을 추진하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 그동안 이름뿐인 원가연동제의 정상화, 신규 사업자의 소매시장 진입 허용, 계약시장 활성화 등 여러 대안들이 제시되었고 전기 요금을 중립적으로 결정하는 독립규제 위원회 신설 필요성이 제기된 지 오래다. 과연 정치권과 정부가 과감히 요금 결정에서 손을 뗄 수 있을까. 위기를 맞았을 때 일수불퇴의 제도를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전력산업 구조 개편의 실기가 아쉽기만 하다.
 
 
 

 이학노 필진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텍사스대 오스틴캠퍼스 경제학 박사 △통상교섭민간자문위원회 위원장

CP-2023-0070@fastview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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