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민당의 정치 비자금 스캔들이 일파만파로 커지면서,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의혹이 제기된 아베파 수장들을 내각과 당 주요 직에서 경질할 예정이라고 일본 언론들이 보도했다. 이들이 아베 신조 전 총리를 필두로 한 일본 정계 최대 세력임에도 불구, 기시다 총리는 향후 정권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자 ‘손절’이라는 특단의 대책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11일 아사히신문은 복수의 정계 고위 관계자를 인용, 기시다 총리가 비자금을 받은 혐의가 불거진 마쓰노 히로카즈 관방장관, 니시무라 야스토시 경제산업상, 하기우다 고이치 자민당 정조회장, 다카기 쓰요시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 그리고 세코 히로시게 참의원 간사장을 교체하는 방향으로 인사를 단행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수사 대상에 오른 이들은 아베 전 총리가 이끌었던 당내 세이와정책연구회 소속으로 일명 ‘아베파’로 분류되는 인사들이다. 정치자금 모금 행사(파티)에서 얻은 수익을 장부에 누락 기재하고, 이를 비자금으로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아사히는 “사실상의 경질”이라며 “기시다 총리는 정권 요직에서 아베파 수장들을 일소(一掃·한 번에 제거)할 태세”라고 덧붙였다.
이에 일본 정계 최대 파벌인 아베파가 사실상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아베파는 자민당 의원 380명 중 99명이 소속돼 당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조직이다. 아베 전 총리가 피살되면서 구심점을 잃었다는 지적도 있지만, 여전히 정권 요직을 출신 의원들이 도맡아 오면서 그 위세를 이어가고 있다. 아사히는 아베파 익명의 중진 의원을 인용, “우리 파벌은 이제 붕괴됐다. 아베파는 끝났다는 충격이 내부에서 나오고 있다”고 내부 분위기를 전했다.
다만 기시다 총리 입장에서는 ‘손절 결정’은 상황을 고려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기시다 정권은 연일 지지율 20%대에서 반등하지 못하고 고전하고 있다. 이번 정치 비자금 스캔들은 원래 아베파뿐만 아니라 기시다 총리가 속한 기시다파 등 자민당 대부분의 파벌을 겨냥한 의혹으로 시작됐으나, 아베파를 제외하고 대부분 기재 누락 건수를 발표하는 등 소명을 마쳤다. 이에 도쿄지검 특수부는 이번 비자금 스캔들의 수사 대상을 아베파로 좁히게 됐고, 아베파 소속 ‘정권 2인자’인 마쓰노 관방장관 등이 줄줄이 연루됐다는 의혹이 보도되기 시작했다.
기시다 총리는 그간 내각 내 파벌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아베파 인사를 들이며 중용 정치를 이어왔다. 그러나 앞으로 검찰 수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리스크가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자, 문제가 되는 아베파와 결별하고 이 문제를 정면 돌파하겠다는 전략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마쓰노 관방장관만 해도 2014년 아베파 본거지인 정치연구회의 사무총장을 지낸 핵심 인물이다. 아직도 연구회 의사결정기구인 상임간사회에 소속돼있다. 수사 과정에서 추가 혐의가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양날의 검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먼저, 장관들을 대거 잘라내면서 정권 불안정성이 커질 수 있다. 특히 마쓰노 관방장관의 경우 내각 2인자로 각종 조율과 정권 브리핑을 담당해왔고, 니시무라 경산상은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로 어민들을 설득하고 반도체 부흥 문제를 맡아왔기 때문에 정권 리스크가 두려워 이들을 팽했다는 지적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여기에 아베파가 이번 인사에 대거 반발할 경우 내부 갈등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결국 어떻게든 현 정권에 미칠 영향을 막을 수는 없다는 뜻이다. 기시다 총리도 의혹이 확산하자 ‘이는 결국 당 전체의 문제’라며 주위에 고민을 토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사히는 “아베파는 2000년 이후 4명의 총리를 배출한 자민당의 상징적 존재”라면서 “기시다 총리는 파벌 기반이 견고하지 않아 아베파에 많이 의존해왔다. 이번 의혹의 확산은 아베파를 하나의 기둥으로 삼아온 기시다 정권의 위기로 직결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전진영 기자 jintonic@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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