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 헤럴드스퀘어에서 만난 김병국 이솔 대표는 “기존 EUV 업계의 전통적 방식이 아닌 파괴적 기술로 EUV 시장 독점을 깼다”며 이솔의 경쟁력을 강조했다. 임세준 기자 |
“한 분야에서 20년 넘게 일하다 보니, 나머지 시간은 우리 반도체 업계에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더라고요. 독점이나 마찬가지인 EUV 시장에 새로운 충격도 주고, 기존 판을 깨보자는 생각으로 창업을 하게 됐죠.”(김병국 이솔 대표)
요즘 반도체 업계의 최대 화두는 단연 EUV(극자외선) 장비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EUV 기술 강국 네덜란드에 국빈으로 방문하며 ‘한-네덜란드 반도체 동맹’을 이뤄낸 가운데, 국내에서도 EUV 관련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국내에도 EUV 장비를 제조하고 있는 기업이 딱 한군데 있다. 삼성전자에서 20여년 간 근무했던 김병국 대표가 지난 2019년 창업한 ‘이솔’이다. 이솔은 이번 네덜란드 순방에 함께 참여해 네덜란드ISTEQ(이스테크)와 차세대 EUV 광원 공동개발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는 성과를 거뒀다.
설립된 지 4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솔이 지금까지 이뤄낸 성과는 상당히 고무적이다. 독일 칼자이즈가 독차지하고 있던 EUV 마스크 리뷰 시장의 독점 구조를 깼고, 세계에서 4번째로 EUV 빛을 다루는 기업이 됐다. EUV 마스크 리뷰 장비는 EUV 마스크를 제작할 때 자주 생기는 결함이 웨이퍼에 찍어도 되는 수준인지 아닌 지를 상세하게 판단하는 장비다.
EUV 시장은 수십년간 천문학적인 투자와 시간이 필요해 진입 장벽이 매우 높은 곳으로 평가받는다. 이처럼 ‘난공불락’ 같은 곳에서 이솔은 어떻게 이런 성과를 낼 수 있었을까. 김병국 대표에게 창업 스토리부터 향후 목표까지 들어봤다.
EUV 광원 개발기 앞에 서있는 김병국(가운데) 이솔 대표 [이솔 제공] |
▶“‘마스크’분야만 20여년…나머지 10년, 업계에 신선한 충격 주겠다”=이솔은 EUV 마스크와 관련된 측정 및 검사 장비를 개발, 판매하고 있다. 김병국 대표는 이솔 창립 전까지 삼성전자 반도체연구소에서 24년 동안 ‘마스크’ 분야 전문가로 일했다. 마스크란 일종의 필름 역할을 하는 부품으로, 처음으로 반도체 회로를 형상화하는 유리 기판을 의미한다. 마스크에 새겨진 패턴을 EUV 장비를 통해 웨이퍼에 형상화해야만 반도체를 만들 수 있다.
김 대표는 “반도체 연구소에서 20년 이상 리더로서 일하다 보니 마스크 업계에서는 거의 그 기술의 끝까지 연구하게 됐다”며 “대기업에서는 해볼 만큼 했으니, 나머지 시간은 의미 있는 일을 해보자는 뜻에서 창업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가 선택한 분야는 전세계 반도체 관련 시장에서 가장 진입 장벽이 높다고 여겨지는 EUV였다. EUV 장비 시장은 사실상 3개 기업들의 독점으로 이뤄져 있다. EUV 노광장비는 네덜란드 ASML이, EUV 마스크 리뷰 장비는 독일의 칼자이즈가, EUV 검사장비는 일본의 레이저텍이 독점 생산한다. 또한 EUV 빛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기업은 전세계에서 이들 세 곳뿐이었다. 관련 기술 수준을 따라잡는데 천문학적인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고, 이미 독점 체제가 탄탄하게 구축돼 있어 누구도 쉽사리 도전장을 던지기 어려웠다.
김 대표는 “EUV 분야 기업들은 500년이 넘은 은행나무라고 보면 된다”며 “ASML을 포함한 세 곳 모두 짧게는 10년, 길게는 20여년을 투자하며 오랜 기간 자생적으로 거목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 대표는 오히려 EUV 시장에 새로운 기회가 있다고 봤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시대에 삼성전자가 일본 기업들을 제친 것처럼, EUV 시대로 넘어가는 전환기가 적기라고 본 것이다. 전통적 방식으로 시장 선도 기업들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접근 방식과 기술로 기존 판을 깨기로 했다.
그는 “우리는 완전히 파괴적 기술을 활용하기로 했다”며 “기존 독일 칼자이즈가 쓰던 전통적인 광학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EUV 이미지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이솔이 만들어낸 새로운 장비를 ‘오토바이’에 비유했다. 지금까지 독일 칼자이즈가 생산하던 마스크 리뷰 장비가 소위 ‘벤츠’였다면, 이솔의 장비는 이보다 훨씬 비용은 적고, 활용성은 높다는 의미다.
그는 “탈 것에 비유를 하자면, 5㎞ 떨어진 곳으로 가야 할 운송수단이 필요한데 시장에 ‘벤츠’밖에 없는 격”이라며 “이솔 제품은 고객사들의 수요에 부합하는 ‘오토바이’ 격으로, 훨씬 낮은 가격에 높은 효율성을 제공한다”고 강조했다.
이솔 대표 제품인 EUV 마스크 리뷰 장비(SREM) [이솔 제공] |
▶“전세계서 4번째로 EUV 다루는 기업 등극…글로벌 장비 톱10 목표”=결과적으로 이솔은 EUV 마스크 리뷰 시장에서 독일 칼자이즈의 독점을 깨는 데 성공했다. 칼자이즈의 제품과 동일한 성능의 장비를 훨씬 저렴하게 만들었고, 동시에 세계에서 4번째로 EUV 빛을 다루는 기업 반열에 올랐다. 반도체 업계가 놀랄 만한 성과다.
ASML, 칼자이즈 등도 20여년 넘게 걸렸던 EUV 기술 개발을 어떻게 이솔은 4년만에 이룰 수 있었을까. 김 대표는 오히려 스타트업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평가한다.
그는 “소위 ‘돈키호테’식으로 일단 저질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며 “모든 성공은 우선 해보는 실행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이건 조금이라도 규모가 있는 회사는 할 수 없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솔은 펀딩 받은 거의 대부분을 R&D 비용에 투자했다”며 “빠른 의사결정과 과감한 투자가 가능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창업 당시 15명이었던 이솔 임직원은 현재 60명까지 늘어났다. 김 대표는 삼성전자, 네이버, ASML 등 재야에 있던 다양한 출신의 핵심 인력들을 끌어모았다.
그는 “반도체연구소에 있을 때부터 오랫동안 이 사람들의 실력을 알아왔고 믿었다”며 “우리 엔지니어들을 믿었던 결과, 10년 정도 걸릴 성과를 약 4년 만에 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솔은 지난해 국내 대형 반도체 제조 기업에 장비를 납품하는 데 성공해 차근차근 사업 실적을 쌓아가고 있다.
김 대표는 “회사는 스타트업인데 저희가 만드는 반도체 장비는 상당히 고가이다 보니 첫 레퍼런스(납품사례)를 잡는 게 정말 어려웠다”며 “다행히 지난해 장비 납품에 성공했고, 지금까지 잘 작동하면서 유지비도 낮아 고객사 만족도가 높다”고 말했다.
이솔의 장기적인 목표는 글로벌 반도체 장비 기업 ‘톱10’에 드는 것이다. 이솔의 EUV 장비는 국내에서 가장 비싼 축에 속하는 만큼, 사업이 안정화된다면 가능할 것이라는 포부다.
김 대표는 “한국이 전세계 메모리 반도체 1위를 20년 동안 했는데, 정작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시장에서 매출 기준 톱10에 들어가는 기업이 한 곳도 없다”며 “우리가 단번에 하이엔드(High-end) 장비를 만들어 EUV 장비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기 때문에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내년부터 본격화될 ‘2나노 시대’에 판을 뒤집을 기회가 더 많을 것으로 자신했다.
삼성전자와 TSMC, 그리고 인텔은 파운드리 분야에서 내년 2나노 공정 기반 양산에 총력을 다할 전망이다. 이를 위해서는 ASML의 차세대 EUV 노광장비 ‘하이 뉴메리컬애퍼처(NA)가 필수적인데, 한 대에 5000억원에 달할 정도로 비용이 높다.
김 대표는 “EUV 산업 자체가 천문학적인 비용이 드는 곳인데, 앞으로 하이NA 시대로 가면 장비 비용을 둘러싼 출혈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라며 “하이NA 장비가 비싼 이유는 스캐너 가격 때문인데, 그럴수록 마스크 리뷰 장비, 검사 장비 등 스캐너 외 주변 장비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이려는 수요가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ASML의 입장에서도 EUV 시장이 커질 수록 자신을 중심으로 한 생태계가 확장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득”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네덜란드 이스테크와의 업무협약을 기반으로, 이솔은 향후 ASML 중심의 EUV 생태계에서 협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평가한다.
김 대표는 “이번 업무협약을 통해 지금보다 한단계 더 높은 하이 퀄리티의 EUV 장비로 진입할 수 있는 R&D 기술을 공동개발하려고 한다”며 “EUV 장비 생태계에서 ASML의 공식 파트너사가 되고, 더 나아가 글로벌 칩메이커 회사들과 협력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민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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