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최근 올해 두 번째 해외 출장을 떠났습니다. 폭넓은 글로벌 네트워크를 가진 이 회장의 출장 소식은 그리 놀랄 일은 아니지만, 이번에 방문한 곳이 이례적인 터라 업계의 관심이 쏠렸는데요.
‘슈퍼을’ 독일 자이스 첫 방문
삼성전자에 따르면 이 회장은 지난 26일(현지시각) 독일 오버코헨에 위치한 자이스(ZEISS) 본사를 방문했습니다. 자이스는 반도체 장비뿐 아니라 의료기기, 연구장비 등 여러 사업을 전개하고 있는 글로벌 광학 기업입니다.
특히 반도체 업계에서는 ‘슈퍼을(乙)’인 ASML의 ‘슈퍼을’이라고 불린다고 하는데요. ASML은 7㎚(나노미터) 이하의 초미세 공정을 구현하기 위해 필수적인 EUV(극자외선) 장비를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공급하는 ‘슈퍼을’로 유명하죠. 자이스는 이 EUV 장비에 탑재되는 광학 시스템을 독점 공급하는 회사입니다.
반도체 회로는 현미경을 사용해야 겨우 관찰할 수 있을 정도로 미세하기 때문에, 반도체 웨이퍼에 회로를 그리기 위해서는 빛을 이용해야 합니다. 이를 노광 공정이라고 합니다.
ASML의 EUV 장비는 약 190~1㎚까지의 자외선인 EUV를 사용해 회로를 새기는데요. 이 과정에서 EUV가 공기에 흡수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내부를 진공 상태로 만들고요. 빛을 흡수하는 렌즈 대신 특수 제작된 ‘반사거울’을 여러 개 장착합니다. 그다음 거울을 이용해 빛을 반사하는 방법으로 웨이퍼에 회로를 새기죠.
여기에 들어가는 특수 반사거울이 자이스의 제품입니다. 자이스는 EUV 장비 1대에만 3만개 이상의 부품을 독점 공급합니다. EUV 기술 관련 핵심 특허도 2000개 이상 보유하고 있다고 하고요. ‘슈퍼을의 슈퍼을’이라고 불리는 이유겠죠.
장비-부품사와 협력해 ‘초격차’
이 회장의 방문을 계기로 삼성전자와 자이스는 파운드리와 메모리 사업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향후 EUV 기술 및 첨단 반도체 장비 관련 분야에서의 협력을 더욱 확대하기로 했는데요. 자이스가 ASML에 부품을 공급하는 회사라는 점에서, 삼성전자와 자이스의 직접적인 거래 관계는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이 회장이 이번 방문에서 칼 람프레히트(Karl Lamprecht) 자이스 CEO(최고경영자) 등 경영진과 만나 협력 강화 방안을 논의한 이유는 뭘까요.
이 회장의 이번 행보는 차세대 EUV 장비, ‘하이 뉴메리컬어퍼처(이하 하이NA)’의 기술력을 발 빠르게 확보하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됩니다. 지난 12월 이 회장은 ASML과 차세대 노광 장비 개발을 위한 ‘EUV(극자외선) 공동 연구소 설립’에 관한 업무협약(MOU)을 맺은 바 있는데요. 양사 공동으로 7억 유로(약 1조원)를 투자해 경기도 동탄에 차세대 반도체 제조기술 R&D(연구개발) 센터를 짓는 것이 골자였죠.
이를 통해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최첨단 메모리 개발에 필요한 차세대 EUV 양산 기술을 조기에 확보할 것으로 기대한 바 있는데요. 삼성전자는 장비 업체인 ASML뿐 아니라 ASML의 핵심 부품사인 자이스와도 협력을 맺고 차세대 기술 확보에 속도를 낼 것으로 보입니다.
삼성전자는 EUV 기술력을 바탕으로 파운드리 시장에서 3나노 이하 초미세공정 시장을 주도하고, 연내에 EUV 공정을 적용해 6세대 10나노급 D램을 양산할 계획인데요. 이번 자이스와의 기술 협력을 통해 차세대 반도체의 성능을 개선할 뿐 아니라 생산 공정 최적화, 수율 향상을 달성해 사업 경쟁력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또 자이스는 오는 2026년까지 480억원을 투자해 한국에 R&D 센터를 구축할 예정인데요. 자이스가 한국 R&D 거점을 마련하게 되면 양사의 전략적 협력에도 긍정적일 것으로 보입니다.
파운드리 반전 꾀하는 삼성
특히 이번 이 회장의 행보는 메모리반도체에 이어 파운드리(위탁생산), 이미지센서 등을 포함한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도 사업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미래 준비의 일환입니다.
특히 파운드리 시장에서 삼성전자는 1위인 TSMC의 벽을 쉽사리 넘지 못하고 있는데요.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전 세계 파운드리 시장에서 TSMC 점유율은 61.2%, 삼성전자는 11.3%입니다. TSMC는 전 분기 대비 점유율은 늘렸지만, 삼성전자는 점유율이 줄며 양사의 격차는 더 커졌는데요. 여기에 인텔까지 올해 말 1.8나노 공정 양산에 돌입한다고 밝히며 경쟁은 점차 심화할 전망이죠.
아직은 TSMC와 삼성의 점유율 격차가 큰 것이 사실이지만, 업계에서는 향후 3나노 이하 초미세공정에 돌입하면 ‘반전’의 기회가 있다고 보고 있는데요. 삼성전자는 현재 경기 평택시, 미국 테일러시에 파운드리 생산라인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종합 반도체 기업인 삼성전자의 반도체 생산시설은 파운드리 전문 업체인 TSMC와 달리 메모리 생산라인이 대부분인데요.
삼성전자가 TSMC에 비해 파운드리 생산 CAPA(생산능력)가 절대적으로 열세였던 까닭이죠. 삼성전자는 현재 건설 중인 대규모 생산시설이 완공되면 본격적으로 시장점유율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또 삼성전자는 2022년 세계 최초로 GAA(게이트 올 어라운드) 기술을 적용한 3나노 양산에 성공하는 등 기술력을 바탕으로 매출을 확대하고 있는데요. GAA는 전류가 흐르는 채널 4면이 게이트로 둘러싸여 있어 3면이 맞닿은 핀펫 구조의 한계를 극복할 차세대 기술로 꼽힙니다.
TSMC는 2나노 공정부터 GAA 기술을 도입하기로 한 반면, 삼성전자는 3나노 공정부터 GAA 공법을 도입해 수율을 끌어올리고 있죠. 여기에 더해 삼성전자는 TSMC보다 상대적으로 뒤처진 ‘수율’을 안정적으로 높이기 위해 내년부터 반도체 공장에 AI(인공지능)와 빅데이터를 활용한 ‘디지털 트윈’ 기술도 시범 적용할 예정입니다. 향후 3나노 이하 초미세공정 경쟁력을 보유한 삼성전자가 시장에서 두각을 드러낼 것이라는 기대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시장조사기관 옴디아는 향후 삼성전자의 3나노 이하 파운드리 시장 성장률(연평균 64.8%)은 전체 시장 성장률(연평균 13.8%)을 크게 상회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업계에서는 현재 삼성의 파운드리 고객사는 100개 이상이며, 2028년에는 200개사가 넘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기도 합니다. ASML-자이스와 손잡은 삼성전자가 막강한 업계 1위 TSMC를 추격할 수 있을지 지켜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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