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이 가자지구 쪽 라파 국경 검문소를 점령하며 가자지구로의 구호품 수송이 막혀 인도주의적 위기 심화가 우려된다. 라파 지상 침공을 “레드 라인”으로 언급했던 미국은 막상 이스라엘방위군(IDF)이 라파에 진입하자 이는 전면 침공과는 다른 “제한적 작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7일(이하 현지시간) 라파 검문소 팔레스타인 쪽 대변인인 와엘 아부 오마르가 이스라엘군 점령 뒤 이 검문소를 통한 구호품 전달 및 이동이 “완전히 중단됐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오마르 대변인은 검문소 폐쇄로 가자지구에서 이집트로 이송돼야 할 환자 46명의 발이 묶였다고 <뉴욕타임스>(NYT)에 설명했다. 가자지구 보건부는 발이 묶인 환자 중엔 유방암, 림프종 환자 등이 포함돼 있다고 덧붙였다.
라파 검문소를 통해 들어오는 물자는 가자지구 인도적 지원의 핵심으로 인도주의 단체의 구호품 배분도 라파 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인도주의 단체들은 비축분이 거의 없어 추가 지원이 끊길 경우 버틸 수 있는 기간이 “하루”에 불과하다고 우려했다.
7일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 가자지구 소장 조지오스 페트로풀로스는 “남은 연료가 주유소 1곳 분량보다 적다. 하루면 소진될 것”이라며 “이후엔 아무 것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병원도 2~3일 이상 운영될 수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이스라엘이 대피령을 내린 6일 이후 매시간 200가구가 라파를 떠나고 있지만 다시금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난민들이 사용할 천막(텐트)조차 부족하다고 우려했다.
다른 구호 통로도 최근 며칠간 폐쇄됐거나 이스라엘 극우 정착민 공격으로 구호 전달에 방해를 받았다. 이스라엘 남부에 라파로 통하는 케렘 샬롬 국경 검문소는 5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박격포 공격으로 이스라엘군 4명이 사망하며 7일까지 폐쇄됐다. 이스라엘 매체 <타임스오브이스라엘>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케렘 샬롬 검문소를 8일 다시 개방했지만 라파 검문소의 폐쇄는 유지했다.
최근 개방돼 소규모 물자가 흘러 들어가는 이스라엘에서 가자지구 북부로 통하는 에레즈 국경 검문소에선 구호품 호송대가 공격 당했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요르단 외무부는 7일 “극단주의 이스라엘 정착민들”이 에레즈 검문소를 통해 가자지구로 향하던 요르단 구호 호송대를 공격했다고 밝혔다. 가자지구에 인질이 남아 있는 한 구호물자를 보내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 우파 시위대는 지난주에도 요르단 호송대를 공격했다.
더구나 에레즈 검문소를 통한 물품은 전투 지역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라파까지 도달하기 어렵다고 구호단체들은 보고 있다. <가디언>은 최근에도 가자지구 중부 누세이라트 난민촌과 북부 가자시티 인근에서 격렬한 충돌이 발생해 구호 호송대의 이동이 막혔다고 설명했다. 매체에 따르면 유엔아동기금(UNICEF) 대변인 제임스 엘더는 “라파 검문소 폐쇄가 연장된다면 가자지구 기근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찾기 어렵다”고 우려했다.
이스라엘 대피령 뒤 라파 지역 의료도 마비되고 있다. 7일 <로이터> 통신은 라파 주요 의료기관인 아부 유세프 알나자르 병원이 이스라엘이 지정한 전투 구역에 포함돼 환자와 의료진이 병원을 떠나며 병원의 3분의 1만 기능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마가렛 해리스 세계보건기구(WHO) 대변인은 이 병원이 가자지구에서 유일하게 신장 투석이 가능한 병원으로 해당 병동 폐쇄 땐 투석 환자 200명이 즉시 생명에 위협을 받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라파 지역의 한 의료 종사자는 <워싱턴포스트>에 병원 기능이 중단돼 “누구든 부상을 당하면 도울 수 있는 건 신밖에 없다”고 말했다.
라파 지상 침공을 “레드 라인”으로 언급했던 미국은 이스라엘의 이번 진격이 미국이 반대한 전면 침공과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미 ABC 방송은 존 커비 미 백악관 국가안보소통보좌관이 7일 기자들에게 “이스라엘 쪽으로부터 간밤 이뤄진 이번 작전은 하마스가 가자지구에 무기와 자금을 밀반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고안된 제한된 작전이라고 들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가디언>은 아론 데이비드 밀러 카네기국제평화재단 선임연구원이 “미국과 이스라엘 관계에 적용되는 레드 라인은 분홍색으로 변하는 습성이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다만 외신들은 미국이 이스라엘의 라파 침공 계획에 반대해 지난주 이스라엘로의 무기 수송을 처음으로 보류했다고 미 당국자 등을 인용해 보도했다. 해당 내용은 5일 미 매체 <악시오스>를 통해 처음 보도됐고 7일 <로이터>는 미 정부 고위 당국자를 인용해 선적이 일시 중지된 무기 규모는 2000파운드(약 90kg) 폭탄 1800개와 500파운드(22kg) 폭탄 1700개라고 전했다.
익명을 요구한 해당 당국자는 <로이터>에 이스라엘 지도부가 라파 침공을 결정할 것으로 보이며 미국이 4월부터 “라파에서 사용될 수 있는 특정 무기들을 이스라엘로 이전하는 것을 주의깊게 검토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 당국자는 “우리는 특히 2000파운드 폭탄의 최종 사용처와 가자지구의 다른 지역에서 봤듯 밀집된 도시 환경에 미칠 수 있는 영향에 초점을 맞췄다. 이 선적을 어떻게 진행할지 아직 최종 결정은 내리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통신은 4명의 소식통에 따르면 지연된 선적엔 유도식이 아닌 재래식 폭탄(dumb bomb)을 정밀유도폭탄으로 전환할 수 있는 보잉사 제조 합동직격탄(JDAM)이 포함돼 있다고 전했다.
<가디언>은 미국의 무기 공급 제한은 이스라엘에 타격이 되겠지만 조 바이든 미 대통령에게 있어 가자지구에 인도주의적 지원을 늘리고 휴전을 달성할 영향력을 줄이는 셈이고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정치적 비용도 상당하다고 지적했다. 밀러 연구원은 매체에 “바이든 대통령이 전략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있다”며 휴전 협상 타결이 유일한 출구라고 분석했다.
이스라엘이 6일 하마스가 받아들이겠다고 밝힌 휴전 협상안이 “핵심 요구 충족과 거리가 멀다”면서도 휴전 협상에 계속 임하겠다고 밝힌 가운데 7일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커비 보좌관은 양쪽이 차이를 해소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며 낙관론을 표명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라파 검문소 점령으로 휴전 협상이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7일 <로이터>는 오사마 함단 하마스 대변인이 이스라엘이 라파에서 군사적 공격을 계속한다면 휴전 협상은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보도했다.
반면 미 CNN 방송은 이스라엘의 계획에 정통한 한 소식통이 라파에 대한 제한적 침공은 휴전과 인질 석방을 가져올 협상에 하마스가 동의하도록 압력을 가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뉴욕타임스>는 7일 이스라엘 언론에 유포되고 하마스 고위 당국자에 의해 진본으로 확인된 하마스 쪽 협상 수정안 내용에 의하면 “지속가능한 평온(sustainable calm)” 문구에 대한 해석 차이가 양쪽의 핵심 갈등 요소라고 짚었다.
지난 4월 이스라엘이 승인해 이집트가 하마스 지도부에 전달한 협상안엔 이 문구가 적혀 있었지만 명확한 해석은 없었는데 하마스가 이번에 수정해 수락하겠다고 한 제안엔 이 문구가 적대 행위의 영구적 중단과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의 완전 철수로 명확히 정의돼 있었다는 것이다. 영구 휴전 및 종전은 이스라엘이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혀 온 내용이다.
미 버락 오바마 정부에서 중동 특사를 지낸 프랭크 로웬스타인은 CNN에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하마스 모두 “그들의 정치적 생존을 보장하는 휴전 협상만을 원한다”며 “하마스에게 그것은 일부 군사적 역량을 보유할 수 있는 영구적 휴전”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완전한 승리”를 공약하고 극우의 연정 이탈 압박을 받고 있는 네타냐후 총리에겐 “전투 일시 중지”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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