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로 불렸던
배우 겸 가수 故 남석훈의
파란만장했던 인생사
배우 겸 가수 남석훈의 별세 소식이 뒤늦게 알려진 가운데, 그의 과거사가 재조명되고 있다.
12일 배우 한지일에 따르면 남석훈은 지난 7일 미국 하와이에서 향년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평안남도 평양 출신인 고인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배우, 가수, 영화 감독 등으로 왕성하게 활동했다. 로큰롤 가수로 활동하면서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고인은 1958년 가수로 데뷔했으며 1962년에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 ‘두만강아 잘 있거라’에 출연하면서 배우로도 데뷔했다. 이후에는 ‘우중화’, ‘악명’ 등에도 출연했고 각 작품의 각본가 및 감독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천의 얼굴을 가진 만능 엔터테이너였던 남석훈
국민 가수이자 배우, 영화 감독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남석훈은 1994년 이후 별다른 방송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TV와 스크린에 얼굴을 비추지 않는 동안에도 꿋꿋이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었다. 백악관 국제침술 주치사, 미국 민주당 한인 대표, 월남 참전 사수사당진상 국제담당 등으로 활발히 활동을 펼쳤다.
그는 목사이기도 했다. 피아노 연주를 통한 음악 치유 사역에 50년을 바쳤으며, 미국 고신 장로교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또한 남석훈은 태권도·합기도 등 각종 무술을 연마했다. 성룡과 이소룡을 배우로 데뷔시킨 것도 남석훈이었다. 이렇게 천의 얼굴을 가진 만능 엔터테이너였던 남석훈은 영화사에 잊지 못할 족적을 남겼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난한 유년기를 보내다
그의 유년 시절은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서울로 이사 왔지만 아버지가 어디 계시는지조차 알지 못했고, 7살의 나이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12살 때는 6·25 전쟁이 발발해 육군 군악대장이었던 아버지가 남석훈을 홀로 내버려두고 부산으로 피란을 갔다. 아버지는 9·28 수복 때 다시 서울로 올라와 아들을 데리고 거제도로 함께 내려갔다.
남석훈은 거제도 포로수용소 근처의 초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아버지는 곧 재혼하여 거제도에서 딸을 낳았는데 하필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남석훈은 세상을 등진 여동생을 담요로 싸서 직접 묻어주어야 했다.
15살에는 춘천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피아노를 배워 1957년 서울로 올라갔다. 고등학교 때는 장차 영화 감독이 되겠다는 포부를 품고 공부에 집중하였으며, 졸업한 후에는 가수로 데뷔하게 되었다.
세계적인 화백이 되어 돌아온 남석훈
배우, 영화 감독, 가수 등으로 활발히 활동하다가 오랫동안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남석훈은 어느 날 화가가 되어 다시 나타났다.
그의 그림은 우중충하고 어두운 빛깔보다는 밝은 톤을 주로 사용하는 특징이 있다. 그는 40년 이상 그림을 그려 오면서 하루에 그림 두 장을 그리지 못하면 잠을 자지 않을 정도로 미술에 열정과 재능을 드러냈다.
밝고 짙은 보색이 조화를 이루는 그의 그림은 내면 세계와 외부 세계 사이의 거리를 좁혀 나가면서도 본인의 내면에 충실하다는 인상을 준다. 또 남석훈의 예술세계에는 그의 종교적인 열정이 반영되기도 했다.
이렇게 다방면에서 부지런히 활동하며 우리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던 남석훈은 2024년 5월 7일 85세를 일기로 떠나게 되었다. 부고를 들은 네티즌들은 “한 시대가 저물었구나”, “좋은 곳으로 가셨기를” 등의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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