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이 구리 확보전에 돌입했다. ‘21세기 석유’라고 불리는 구리는 전기차는 물론 인공지능(AI) 산업 필수 인프라인 데이터센터에 들어간다. 또한 재생에너지로 생산된 전기를 다루는 전력망에 구리가 쓰이는 등 친환경 산업 확대로 수요가 늘었다. 하지만 구리 광산 개발이 난항을 겪으면서 구리 공급이 수요를 맞추지 못하고 있다. 이에 미국 뉴욕에서 거래된 구리 선물이 16일(현지 시각) 사상 최고치 기록하는 와중에 구리 확보, 이를 위한 광산 개발 경쟁이 불붙었다.
14일(현지 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소식통을 인용해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최대 30억 달러인 잠비아 광산 지분 인수와 관련해 투자자들과 논의를 시작했다”며 “목표는 중국이 중요 금속과 광물의 글로벌 공급을 장악하는 것을 막는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미국은 지난해에도 잠비아에서 아랍에미리트(UAE)가 모파니 구리 광산에 대한 투자를 고려할 것을 촉구했다”고 했다.
미국에는 광업부, 국부펀드 등이 없다. 이런 환경은 국영 기업에 막대한 투자를 지시할 수 있는 중국과의 경쟁에서 불리하다. WSJ는 “미 정부가 국가 안보 프로젝트에 직접 투입할 수 있는 자금은 제한돼 있다”며 “국내외 민간기업은 물론 국부펀드를 보유한 우호국과 협력해 그들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 자산에 투자하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일례로 미국은 지난해 사우디아라비아와 손잡고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리튬 및 코발트 확보에 나섰다. 사우디는 광산 지분을 갖고 미국 기업은 광산 채굴권 일부를 보장받는 구조였다.
미국은 지난 수년간 친환경 산업 성장이 급속 성장하자 원자재 시장에서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구리 확보에 나섰다. 그 중심에는 해외 프로젝트 자금 조달을 돕는 연방 기관인 국제개발금융공사가 있다. 이 기관은 지난해 광산 부문에만 7억4000만 달러를 투자했다. 이는 기존 광산 프로젝트에 투자한 2억4500만 달러보다 두 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현재 미국은 파키스탄에 있는 구리 광산에도 수십억 달러를 투자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협상이 마무리되면 파키스탄 구리 광산에서 2028년부터 채굴이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아일랜드의 테크멧(TechMet)이라는 회사는 미국의 대표적인 투자처 중 하나다. 도널드 트럼프 전임 정부와 바이든 정부는 국제개발금융공사를 통해 테크멧에 약 1억500만 달러를 투자해 2대 주주가 됐다. 테크멧은 리튬, 코발트, 니켈, 희토류 채굴업체의 지분을 소유한 기업이다. 남아프리카 출신인 테크멧의 최고경영자(CEO) 브라이언 메넬은 “우리는 제2의 냉전을 겪고 있다”며 “서구의 가치관과 독재 간의 경쟁에서 나는 단 한 순간의 의심도 없었다”고 했다.
중국은 정부의 지원하에 빠르게 광산 투자를 늘리는 중이다. 상하이 푸단대학교 녹색금융개발센터에 따르면 중국은 브라질이나 호주를 제외한 일대일로 국가를 대상으로, 지난해 금속 및 광산 투자에 190억 달러 이상을 지출했다. 이는 2022년보다 158% 증가한 수치이자 2013년 이후 최고 수준이다.
중국은 콩고에서 코발트 및 구리 광산을 개발하고 있는 광산 기업 쉐마프(Chemaf)를 인수하기 위한 사전 협상에 들어갔다. 쉐마프는 콩고의 모든 자원을 관리하는 국영기업 제카마인스(Gecamines)의 개발 대행사다. 칠레 북부에서 구리와 코발트 사업을 운영하는 미국 기업을 포함해 최소 두 명의 서방 기업 역시 쉐마프 인수에 관심을 보이면서 중국과 경쟁하고 있다.
◇ 친환경 산업 확대 → 구리 수요 증가
이처럼 구리 확보전이 벌어진 것은 전기차 보급 확산, AI 개발 속도전 등으로 구리 수요가 늘었기 때문이다. 골드만삭스의 제프 커리(Jeff Currie) 원자재 리서치 글로벌 수석은 2023년 9월 CNBC와의 인터뷰에서 구리가 석유만큼이나 중요한 원자재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골드만삭스는 2040년 친환경 목적으로 사용되는 구리의 양은 2023년 대비 47% 늘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미국 지질조사국에 따르면 전 세계 구리 매장량은 28억 톤 규모다. 2022년 기준, 전 세계 광산의 연간 생산능력은 2700만 톤이며, 제련 생산능력은 3100만 톤이다. 구리는 태평양 연안을 따라 주로 매장돼 매장돼 있으며 칠레, 페루, 미국 애리조나주 등에서 주요 채굴사가 광산을 개발 중이다.
문제는 많은 광산 개발사가 구리를 채굴, 제련하고 있지만 구리 재고량은 갈수록 감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런던금속거래소에 따르면, 구리 재고량은 2013년 최대치 67만8000톤을 기록한 이후 지속해서 감소했다. 지난해 재고 최대치는 10만7000톤에 불과했고, 최저치는 5만1000톤이었다. 구리 재고량이 급감한 것은 급증하는 수요를 공급이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리는 전 세계 매장량의 약 12%만 채굴됐다. 매장량이 많기에 광산을 추가로 개발하면 공급이 늘 수 있다. 하지만 신규 개발이 쉽지 않다. 일례로 북미 최대 구리 매장지인 알레스카주 페블(Pebble) 광산은 노던 다이너스티 미네랄(Northern Dynasty Minerals)사가 타당성 검토를 마치고 2018년에 건축 승인 심사(인허가)를 제출했다. 그러나 미 환경청은 광산 인근 어장 훼손, 환경 오염 등의 이유로 승인을 거부했다.
채굴 중인 광산에서 생산에 차질을 빚는 경우도 있다. 파나마의 코브레 파나마(Cobre Panama) 광산은 환경 훼손과 지역 주민의 건강에 대한 우려로 폐쇄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오랫동안 지속돼 왔다. 이 와중에 파나마 법원은 지난해 11월 지난 20년간 퍼스터 퀀텀 미네랄(First Quantum Minerals)의 채굴 허가는 불법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후 코브레 파나마 광산은 폐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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