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전 바른미래당 의원(이하 직함 생략)는 1962년 1월 22일 경상남도 밀양시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지나, 학창시절의 성적은 그다지 우수하지는 않았으며 과학 분야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거뒀던 것은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학업성적 대신 독서를 매우 좋아해, 부산 동성국민학교 재학 시절 학교 도서관의 책을 거의 다 읽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소설책이나 과학 도서와는 달리 교과서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컴퓨터에 흥미가 많던 의사
그가 본격적으로 학업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재학 시절부터였다. 본격적으로 학업을 시작하면서 우수한 성과를 보이고, 1980년에는 대학교 입시에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의과대학의 학부 수업은 그다지 그에게 큰 흥미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오히려 대학교 3학년 재학 중이던 1982년 가을에 처음으로 접한 컴퓨터가 오히려 그에게는 더 큰 흥밋거리였다.
1986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그는 대학원으로 진학해 생리학 교실에서 기초의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대학원에서 심장 부정맥을 연구하는 심장 전기 생리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을 때 처음으로 컴퓨터 바이러스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 한 잡지에서 컴퓨터 바이러스가 한국에서 나왔다는 기사를 보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50장가량의 디스켓을 검사하고서 3장이 바이러스에 감염돼 있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의대 교수와의 갈림길에서 창업을 선택하다
안철수는 전공 실험을 위해 배웠던 컴퓨터 언어를 활용해서 직접 ‘백신’을 만들기 시작했다. 분석 끝에 그는 바이러스가 감염된 과정을 반대로 밟아가는 치료 방법을 강구하고서 ‘백신(Vaccine)’이라는 이름의 바이러스 치료 프로그램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것이 최초의 안철수 백신의 시작인 ‘V1’이 되게 된다. 이후 그는 악명을 떨치는 컴퓨터 바이러스가 나타날 때마다 ‘V2’, ‘V2 PLUS’ 등의 이름을 붙여 백신 프로그램을 무료로 배포하게 된다.
낮에는 의사로, 밤에는 백신 프로그램 제작자로 7년 동안 활동하던 그의 ‘이중생활’은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컴퓨터 바이러스는 매년 2배씩 증가하고, 의사로서도 교수로 발돋움할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시기가 도래했다. 갈림길에서 안철수는 의대 교수의 길을 포기하고, 컴퓨터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다른 의미의 의사’가 되기로 결정하게 된다. 7년 동안 모은 자료를 가지고 여러 기업들을 찾아가 상담했으며, 기업을 만들라는 조언에 따라 컴퓨터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백신 프로그램 제공사를 창업하게 된다. 1995년 3월 15일 그가 창업한 기업의 이름은 바로 ‘안철수연구소’였다.
안철수연구소의 성공, 그리고 일선에서 후퇴
‘V3’ 시리즈를 제품화한 안철수는 회사 창립 직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교에서 공학 석사 과정을 밟던 그에게 안철수연구소에 대한 1,000만 달러 규모의 M&A 제안이 들어온 것은 1997년이었다. 안철수는 매년 적자가 커지고 있는 안철수연구소에게 있어 절호의 기회인 거액의 인수 제안에도 불구하고, 지금 회사가 매각된다면 임직원들이 해고될 수 있다는 우려에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1999년에 ‘체르노빌 바이러스’ 사건이 일어나면서 회사의 매출은 급증했고, 대한민국 소프트웨어 업체로는 ‘한글과 컴퓨터’에 이어 두 번째로 연 매출 100억 원을 돌파하는 쾌거를 거두게 된다.
안철수가 회사의 경영자 자리를 내려놓고 일선에서 물러난 것은 2005년이었다. 회사를 창립한지 만 10년이 되는 때, 그는 안철수연구소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나 이사회 의장 자리를 맡게 된다. 그리고 다시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미국 펜실베니아대학교 샌프란시스코캠퍼스에서 MBA 과정을 밟았다. 긴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그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2008년 4월이었다. 이후 그는 KAIST에서 경영학과 교수로 기업가 정신을 가르치다가 2011년 6월부터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 대학원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유력한 서울시장 후보, 그리고 양보
성공한 소프트웨어 전문 기업가로서 그는 정치권과도 일찌감치 연을 맺어온 인물이었다. 2001년 5월에는 김대중 정부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자문위원으로, 2003년에는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 국민대표 8인 중 한 명으로 참석한 바 있다. 또한 이명박 정부에서는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의 민간위원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의 정치인으로서의 가능성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시골의사 박경철, 방송인 김제동과 함께 진행한 ‘청춘콘서트’ 때부터로 주로 이야기되는데, 향후 그의 정치적 기반이 되는 지지층이 청춘콘서트 때부터 본격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011년의 보궐선거에 안철수의 무소속 출마 가능성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정치계의 입문 가능성을 강력하게 부인해 왔던 그의 태도가 바뀐 것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안철수의 정치권 진출 가능성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 집권 세력이 역사를 거스르고 있다”며 “내가 출마하면 야권 단일화에 참여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라는 의사를 밝히기도 한 안철수는 결국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직을 당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였던 박원순 현 서울시장에게 양보하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정치권 태풍의 눈으로 떠오르다
이로 인해 안철수가 서울시장보다도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추측이 나오기 시작했다. 바로 ‘대선’이었다. 안철수가 강력한 대권주자로 급부상하기 시작하면서, 한때는 문재인 현 대통령 이상의 지지율을 누를 정도로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중도-보수 진영 후보 통합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고 문재인 당시 후보의 지지율이 상승하면서, 안철수는 2012년 11월 23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후보 사퇴를 선언하고 만다. 그리고 보수 진영이 승리를 거둔 대선 이후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 노원 병 선거구에 출마해 60.5%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초선 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하게 된다.
정치권의 처음 시작을 주로 민주당 진영의 인물들과 함께 했던 것과는 달리, 현재 그는 중도-보수 진영의 유력한 대권주자로 꼽히고 있다. 그는 2013년 11월 새정치민주연합의 공동대표로 취임하였으나, 이듬해 치러진 재보선 참패로 인해 공동대표직에서 사퇴하고 2015년에는 새정치민주연합 탈당이라는 선택지를 취했다. 그리고 함께 탈당한 김한길, 천정배 등과 함께 2016년 2월 ‘국민의당’을 창당해, 신당의 공동대표를 맡게 된다.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의 합당
국민의당은 이후 총선에서 호남과 수도권 지역의 선전으로 38석이라는 의석을 확보하는 돌풍을 일으켰다. 이 기세를 몰아 그는 손학규, 박주선과 겨룬 끝에 당의 대선 후보가 돼, 제19대 대선에 출마하게 된다. 대선 출마 직후 그의 지지율은 문재인 당시 후보와 접전으로 평가될 정도로 높았으나, 대선 기간 동안 여러 약점이 노출되면서 끊임없는 지지율 하락을 겪었다. 결국 대선의 결과는 21.4%의 득표율로, 문재인 대통령은 물론 자유한국당 홍준표 당시 후보에게도 뒤지는 3위의 결과로 나타나고 말았다.
대선을 기점으로 정치인 안철수에 대한 지지도는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치권에서는 안철수의 재기가 힘들 것으로 점치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2017년 8월 서울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국민의당 전당대회에서 다시금 당 대표에 당선되는 저력을 보여주게 된다. 그리고 그는 당선 직후, 당내의 여론조사 결과를 이유로 들어 바른정당과의 합당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호남 지역의 정치인들 다수는 국민의당을 떠나 민주평화당을 창당했으며, 안철수의 호남에서의 지지도도 다시금 흔들리게 된다.
연이은 낙선, 정계 은퇴와 복귀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은 합당 이후 ‘바른미래당’으로 다시 태어났으며, 안철수는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2018년 4월 그는 한때 출마를 포기했던 서울시장직을 위한 지방선거 출마를 공식화했다. 서울시장 선거 과정에서 중도보다도 보수에 더 가까운 스탠스를 보여준 안철수는 하지만 자유한국당 김문수 후보에게도 뒤지는 3위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다시금 낙선의 쓴맛을 보게 된다. 낙선 이후 안철수는 정계 입문 5년 9개월 만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히고 해외로 발길을 돌렸다.
이후 안철수는 1년 4개월 동안 정치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연이은 선거에서의 참패로 인해 그를 찾는 목소리도 이전보다는 뜸해진 상황 속에서, 다시금 총선의 시기가 찾아왔다. 그리고 안철수는 2020년 1월 2일, 정계 복귀를 선언했다. 동월 19일에는 귀국하면서 공항을 찾은 취재진을 상대로 정부에 대한 의견, 여당과 야당에 대한 비판, 총선 공약 구성 등 다양한 의견을 쏟아내기도 했다. 현재 정치권은 중도-보수 진영이 분열의 위기에 놓여있다. 이 상황 속에서 안철수는 예전처럼 다시 진보도, 보수도 아닌 ‘제3진영’에서 자신의 길을 찾을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지금 그는 과거처럼 ‘깨끗한 정치인’의 이미지도 가지고 있지 못하며, 그를 대표하는 ‘새정치’는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실체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진보 진영의 불신과 보수 진영의 견제 속에서, 과연 안철수는 과거 자신이 몇 번이고 보여줬던 ‘돌풍’을 총선 국면에서 다시금 일으킬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글 : 최덕수 press@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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