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하고 악랄한 범죄와 관련된 뉴스가 하루가 멀다 하고 등장하고 있다. 피해자들을 고통스럽게 만든 가해자들에 대한 분노가 뜨겁지만, 국민 법감정과 실제로 이루어지는 법원 판결 사이에는 늘 괴리가 존재한다. 국민 법감정은 ‘해당 사안에 자신의 감정을 반영해 법이 구현했으면 하는 정의’ 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 ‘국민 법감정’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법원 판결에 사람들은 사법기관의 공정성마저 의심하고 있다. 심지어 ‘죄를 저지른 범죄자보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유를 들어 솜방망이 처벌을 하는 판사가 더 나쁘다’는 의견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국내 법원 판결 중 국민 법감정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감형 사유는 무엇이 있었을까? 10가지를 모아 봤다.
술을 마셔서
국민들 사이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다’는 감형 사유의 대표 격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심신미약을 근거로 하는 ‘주취감형’이다. 실제로 주취감형이 인정되는 사례는 많지 않지만,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게재된 ‘주취감형(술을 먹으면 형벌 감형) 폐지를 건의(청원)합니다’라는 글에 2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동의할 정도로 논란이 많다. 이 조항이 적용된 사례 중에서 국민들의 가장 큰 공분을 샀던 사례는 ‘조두순 사건’이다. 2008년 아동을 잔혹하게 성폭행한 조두순은 당시 만취 상태였다는 이유로 심신미약이 인정돼 1심 징역 15년에서 2심 12년형으로 감형됐다. 이 사건은 성범죄에 한해 음주 또는 약물로 인한 심신장애 상태인 경우 감형을 제한하는 특별법 조항(성폭력특례법 제20조)이 생기는 계기가 됐다.
고도 비만으로 인한 외모 콤플렉스
미성년자를 협박해 성착취를 자행한 남성에게 법원이 고도 비만으로 인한 ‘외모 콤플렉스’를 이유로 선처를 해 논란이 일었다. 1심 재판부는 잘못을 인정하고 깊이 반성하고 있는 점, 직접 피해자를 추행하지 않은 점, 피해자로부터 전송받은 사진과 영상을 실제로 유출했다고 의심할 만한 정황이 보이지 않는 점, 형사처벌을 받은 전력이 없는 점 등과 더불어 ‘고도 비만 등 외모 콤플렉스로 인해 주로 인터넷상에서 타인과 교류하던 중 경솔한 판단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라며 징역 2년 6개월의 처벌을 내렸다. 아동⋅청소년 이용 성착취물 제작죄는 최소 징역 5년형이 나와야 하지만, 판사 재량으로 선고할 수 있는 최저형을 받은 것이다. 형이 무겁다며 항소한 이 남성에게 2심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는 사정이 있다고 해서 범행을 저지른 경위에 참작할 수 없다’라며 1심 판결을 지적했으나, 검찰이 항소하지 않았기 때문에 징역 2년 6개월의 형을 유지해야 했다.
결혼으로 부양할 가족이 생겨서
약 2년 8개월간 다크웹을 통해 접속 가능한 아동·청소년 성 착취물 사이트 ‘웰컴 투 비디오’를 운영한 손정우를 솜방망이 처벌했다는 논란이 불거졌다. 미국의 경우, 웰컴 투 비디오에서 아동 성착취물을 내려받은 이들에게 징역 5~15년을 선고하는 등 강력하게 처벌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사이트를 직접 운영한 손정우에게 1심에서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2심에서는 징역 1년 6개월 실형을 선고해 올해 4월 만기 출소했다. 항소심에서 손정우는 “혼인으로 부양할 가족이 생겼다”며 선고 2주 전에 혼인신고서를 제출하고 선처를 호소했다. 재판부는 이를 감형 요소로 삼아 실형을 선고하나 형량을 6개월 줄였다. 최근 MBC 시사 프로그램 ‘PD 수첩’에서 과거 국제결혼 중개소를 운영했던 그의 아버지 영향을 받아 손 씨가 매매혼을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보도 돼, 또다시 재판부의 결정에 비판이 일기도 했다.
교화 가능성이 있어서
초등생을 성폭행하고 온라인에 영상을 올리겠다고 협박한 뒤 금품을 갈취한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에게 ‘소년법’을 적용해서 처벌 대신 ‘보호 처분’을 내려 큰 공분을 샀다. 이 남학생은 SNS를 통해 한 초등학생의 개인 정보를 알아낸 뒤 영상 통화로 음란 행위를 강요하고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 성폭행까지 저질렀다. 이어 성폭행 장면을 영상으로 찍은 뒤 협박해 돈을 갈취했다. 검찰은 이 남학생을 미성년자 추행과 강간, 불법 촬영, 공갈, 협박 등 5가지 혐의로 구속기소 해, 최단 5년, 최장 7년의 징역형을 요청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비행 정도가 낮고 교화 가능성이 있다’는 등의 이유로 사건을 가정법원으로 보냈고, 결과적으로 보호 처분을 받았다. 보호 처분은 소년을 보호관찰해 교화시킨다는 것에 목적이 있어 최대 2년간 소년원에 넘겨질 뿐, 신상 공개나 취업 제한 등의 불이익도 없다.
반성문을 제출해서
사진 : SBS <친애하는 판사님께>
만취한 여성을 집단 성폭행하고 상대방 동의 없이 몰래 촬영한 성관계 영상을 11차례 유포한 혐의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던 전직 가수 정준영이 항소심에서 1심보다 1년 적은 5년 형을 선고 받았다. 피해자를 집단 성폭행한 혐의로 같이 기소된 최종훈은 피해자와 합의해 1심에서 선고받은 5년보다 크게 줄은 2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와 달리 정준영은 항소심 선고가 나올 때까지 피해자와 합의조차 못했는데, 어떻게 감형받을 수 있었을까? 재판부는 “합의를 하지 못했고, 본인은 공소사실을 부인하고 있지만 당시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진술하며 행위에 대해 반성하는 점을 고려했다”며 양형 배경을 설명했다. 실제로 정준영은 1심 이후 총 4통의 반성문을 낸 것으로 확인됐다. 피해자와 합의를 하지는 못했지만, 반성을 하고 있다는 법원의 판단이 있던 것이다.
직장을 잃을 수 있어서
실직이 우려돼 감형된 사례도 있다. 공기업 직원이기도 한 상습 보복운전자가 1심에서 징역형을 받았으나 항소심에서 벌금형으로 감형됐다. 이전에도 보복운전으로 수차례 형사처분을 받은 그는 2017년, 피해자의 승용차가 무리하게 끼어들려 하자 3차례 급정거하는 방법으로 피해자를 위협해 특수협박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 잘못을 인정하고, 합의도 했으며, 심리 상담을 받는 등 재범을 막으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보였으나, 1심 재판부는 “피고인은 그동안 보복운전으로 수차례 처벌받았는데도 또 범행을 저질러 죄질이 무겁다”라며 징역 4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하고 사회봉사 80시간을 명령했다. 징역형을 받으면 직장인 공기업에서 면직 처리가 되기 때문에 항소를 했고, 그 결과 벌금 500만 원이 선고됐다. 재판부는 “징역형이 선고되면 직장을 잃는데 부양가족이 있는 피고인에게 가혹해 보인다”며 “피고인이 재범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점 등을 고려해 양형했다”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책임감을 가진 사람으로
취급할 수 없어서
사진 : YTN NEWS
일명 ‘어금니 아빠’라고 알려진 이영학은 중학생인 딸의 친구를 성추행하고 살해한 뒤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 이어 대법원 판결에서도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1심 재판부는 “비록 사형이 집행되지 않더라도 사형수로서 평생 참회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피해자와 유족에 대해 이 사회가 마땅히 가져야 할 공감과 위로라 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고 ” 피고인을 이성적이고 책임감을 가진 사람으로 취급해 사형을 선고하는 것은 가혹하다”라는 감형 사유를 밝혔다. 한편 이영학은 아내를 성매매하도록 알선하고 그 장면을 몰래 촬영한 혐의, 자신의 계부가 아내를 성폭행했다고 경찰에 허위 신고한 혐의 또한 조사 과정에서 드러나기도 했다.
여론의 지나친 관심이 1심 선고에
영향을 미쳐서
사진: Youtube <그것이 알고싶다 공식계정>
중학생을 무참히 살해했지만 사회적 책임을 가해자에게만 돌리는 것은 가혹하다는 이유로 감형된 사례도 있다. 부산의 한 중학생의 집에 침입해 빈집으로 끌고 가 성폭행하고, 범행을 숨기기 위해 살인까지 저지른 뒤, 시신을 물통에 숨기고 달아난 혐의로 구속 기소돼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김길태가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것이다. 재판부는 김길태의 모든 혐의가 인정되고 정신질환은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형은 가혹하다고 밝혔다. 범행 과정에서 피해자가 저항하자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계획적이라기보단 우발적인 것에 가깝다고 판단했다. 아울러 여론의 지나친 관심이 1심 선고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과 폭행하는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으며 전과자를 냉대하는 사회적 인식으로 ‘반사회적 인격장애’가 형성됐는데, 그 책임을 김길태에게만 돌리는 것은 가혹하다는 점, 김길태가 숨지게 한 사람이 한 명이라는 점 등이 감형 사유에 포함됐다. 대법원에서도 무기징역을 선고한 원심이 확정됐다.
고의가 없어서
사람을 죽였지만, 고의가 없다고 보고 1심보다 2심에서 형이 대폭 감형된 사례도 있다. 아내의 온몸을 골프채와 주먹으로 때려 숨지게 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유승현 전 김포시의회 의장이 2심에서 살인의 고의는 없다고 보고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살인은 무죄로 판단하되, 상해치사죄를 유죄로 인정했다. 유 전 의장은 우발적 범행을 주장했지만, 검찰은 유 전 의장이 아내의 불륜 사실을 알고 범행을 저질러 살해 동기가 명확하다고 반박했다. 또 범행 이후 한 시간 동안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피해자가 현장에서 사망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유 전 의장이 폭행 당한 아내를 침대에 눕히고 더러워진 옷을 갈아 입혔고, 피해자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은 직후 피해자의 신체 이상을 발견하고 곧바로 119에 신고했다’며 ‘폭행 후 아내를 살해할 의도로 방치한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학교에서 제적당할 수 있어서
2015년 의학전문대학원 동기이자 여자친구인 피해자가 전화를 성의없게 받았다는 이유로, 뺨을 수차례 때리고 몸을 걷어차는 등 4시간 넘게 감금 폭행한 혐의를 받고 기소된 가해자의 판결에 대해 큰 논란이 일었다. 이 사건으로 피해자는 늑골 골절 등 전치 3주의 상해를 입었지만, 가해 남성은 오히려 자기가 맞았다고 주장했다. 다행히 폭행 현장의 녹음 파일이 있어 피해자는 억울함을 풀 수 있었다. 이에 검찰은 징역 2년을 구형했지만, 재판부는 “죄질이 좋지 않다”라면서도 “피고인이 의전원생으로 집행유예 이상의 형을 선고받을 경우 학교에서 제적될 위험이 있다”라며 벌금 1,200만 원을 선고했다. 이후 피해자는학교 측에 가해자와 마주치지 않게 수업시간을 조정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론이 들끓자 가해 남성은 사건이 발생한지 1년 8개월 만에 조선대 의학전문대학원에서 제적될 수 있었다.
글 : 이윤서 press@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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