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캔들IN뮤지엄
영화
영화 <배트맨(1989)>에서 조커는 고담 미술관에 나타나 부하들과 함께 작품들을 훼손한다. 에드가 드가, 렘브란트, 르누아르 그 누구의 작품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에게 미술관은 그저 놀이터일 뿐이고 대작들은 마음껏 물감을 칠할 수 있는 도화지였다. 조커와 그 일동들은 전시된 작품들을 훼손하며 미술관을 누비는데 무리 중 하나가 어떤 작품을 찢으려고 칼을 높이 들자 조커가 그 앞을 막아서며 말한다. “I kinda like this one, Bob. Leave it.(이건 좀 마음에 들어, 밥. 그냥 놔둬.)” 미술관 테러를 즐기던 조커가 손수 나서서 막아설 만큼 마음에 들었던 그림은 어떤 것일까.
조커의 마음에 들어 한 작품은 영국계 아일랜드의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이 그린 <고기와 남자 형상>이다. 움푹 팬 눈, 일그러진 얼굴의 마치 고문을 받는 듯 괴로워하는 남성이 앉아있다. 그 옆으로는 도살장에서나 볼 법한 살이 발려진 고깃덩어리가 양옆으로 기괴하게 펼쳐져 있다. 어딘가 기괴하고 음침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왜 이런 작품을 창작한 것일까? 그의 생애는 어떠했을까. 베이컨의 아버지는 육군 대위였다. 퇴역 후에는 경주마 조련사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군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여전히 스스로를 대위로 칭했고 군림하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아들 베이컨은 너무도 허약했다. 두통과 천식을 달고 살며 비실대는 아들이 자신처럼 강하고 늠름한 남자로 성장하길 바랐다. 그래서 동료 마부에게 채찍을 건네며 말했다.
“내 아들을 때려주시오.” 그날부터 베이컨은 매일같이 맞았다. 매섭게 살갗을 파고드는 채찍은 여린 몸에 핏덩이를 만들었다. 정육점 고기처럼 내쳐지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통증을 느꼈다. 그런 어린 시절을 보내서였을까. 그의 그림에서 인간의 육체는 마치 정육점에 걸린 고깃덩이 같다. 살점들은 갈기갈기 찢겼고, 얼굴은 기이하게 뒤틀려 있다. 도축을 당한 고기처럼 육체가 헤집어져 있다.
16살 때 베이컨은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집에서 몰래 어머니의 속옷을 입으며 돌아다니던 베이컨은 아버지에게 그 모습을 들켰고 죽기 전까지 맞았다. 아버지는 동성애자인 아들을 몹쓸 병에 걸린 사람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이미 맞는 것에 익숙해진 베이컨은 아버지의 폭력이 두렵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남성들과 관계를 이어갔고 결국 이 일을 계기로 집에서 쫓겨났다. 삼촌들이 있는 베를린으로 넘어간 베이컨은 그곳에서 자유롭게 생활한다. 동성애 클럽을 드나들었고 여러 명의 남성들과 잠자리를 즐기며 방탕한 생활을 했다. 심지어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자 동성애자들을 상대로 몸을 팔기도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파리에 들렸는데 여기서 피카소 작품을 접하고 충격과 전율을 느끼며 자신도 화가가 돼야겠다고 다짐한다. 이후 베이컨은 런던에 정착해 가구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생계를 유지하며 틈틈이 습작을 그렸다. 이 시기에 베이컨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 두 개의 작품이 있다. 첫 번째는 뭉크의 <절규>였고 또 하나는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의 영화 <전함 포템킨(1925)>이다. 인간의 고통과 절망, 이것을 표현하는 예술가의 삶에 깊은 감명을 받은 베이컨은 자신도 그러한 작품들을 창작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
(왼) <교황 이노첸시오 10세의 초상화>, 1650, 디에고 벨라스케스. <오> 벨라스케스의 교황 이노첸시오 10세 초상화에 따른 연구, 1953, 프란시스 베이컨, 디모인 미술관
<벨라스케스의 교황 이노첸시오 10세 초상화에 따른 연구>는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교황 이노첸시오 10세의 초상화>를 보고 영감을 받아 베이컨만의 왜곡된 버전으로 그린 작품이다.
우리는 고깃덩어리이고 잠재적인 시체입니다. 정육점에 가면 동물 대신 내가 그곳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 의외라는 생각을 늘 합니다.
미술 평론가 데이비드 실베스터와의 인터뷰에서 베이컨이 했던 말이다. 그는 “정육점에 들어가서 고깃덩어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살피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다른 생명을 잡아먹고 사는 삶에 깃든 모든 공포에 대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베이컨의 시선에서 인간은 ‘잠재적인 시체’, ‘정육점에 들어가지 않은 운 좋은 고깃덩어리’였다. 권위 있고 신성하게 포장된 교황도 예외는 아니었다. 벨라스케스의 작품에서 금빛 주교좌는 권위 있어 보이지만 베이컨의 그림에서 그것은 교황을 고통스럽게 가두는 창살 같아 보인다. 교황은 마치 고문을 받는 듯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고 벌어진 입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듯하다. 불안, 공포, 혼란, 긴장감을 모두 느낄 수 있는 이 작품은 17세기 교황이 지닌 절대적 이미지에 대한 전복을 꾀한다. 무엇보다 절대적이고 두려운 존재였던 교황도 언제든 ‘고깃덩어리’로 전락할 수 있는 연약한 육체를 가진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창작 초기 거부당했던 그의 그림은 데이비드 실베스터를 비롯한 미술 평론가들의 극찬으로 인해 재평가됐고 1960년대에는 미술계의 영역을 확장해낸 거장으로 대우받았다. 1964년, 그의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베이컨의 연인으로 널리 알려진 조지 다이어(George Dyer)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베이컨의 작품처럼 특이했다. 다이어는 베이컨의 집에 든 30살의 젊은 좀도둑이었고 소년원과 감옥을 드나드는 신세였다. 베이컨은 자신의 집을 털러 온 이 젊은 좀도둑을 보고 전에 느껴보지 못한 강렬한 감정을 느꼈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날부터 다이어는 베이컨의 뮤즈이자 연인이 됐다. 베이컨은 다이어를 모델로 다양한 작품들을 창작해냈다. 자신과 닮은 모습의 다이어는 영혼의 단짝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다이어도 베이컨 못지않게 자기 파괴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베이컨이 다른 남자에게 한눈을 팔 때면 서슴없이 자해를 했고 스스로를 망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두 사람 다 위태로웠고 불안정했다. 베이컨에 대한 애정이 커질수록 다이어는 괴로워졌고 우울증, 강박증에 시달리다 1971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파리에서 베이컨의 대규모의 회고전이 열리기 이틀 전이었다.
베이컨은 호텔 화장실에서 연인의 시체를 발견했고 큰 충격을 받았다. 마음속은 뒤틀어질 것 같았지만 아무렇지 않게 회고전에 웃으며 나타났다. 회고전은 성대하게 마무리됐고 집에 돌아온 베이컨은 깊은 슬픔과 죄책감에 잠겼다. 다이어의 죽음은 그에게 큰 충격으로 각인됐고 그는 강박적으로 죽은 다이어, 배경조차 그리지 않은 인물화를 그렸다. 오직 고통과 불안에 떠는 뒤틀린 인간에 초점을 맞춰 그렸다.
훗날 새로운 연인을 만나 안정감을 찾은 베이컨은 후기로 갈수록 따뜻하고 밝은 색채를 사용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가 그린 인간의 모습은 뒤틀려있고 웅크려있다. “언어로 표현된다면 왜 그리려 하겠는가”. 베이컨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인간 내면에 잠재워진 공포감과 고통을 전면으로 드러냈다. 거칠어 보이지만 한눈에 와닿는 베이컨의 작품들에는 순간의 이미지를 화폭에 담기 위한 그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글 = 썸퍼 썸랩 인턴 에디터
감수 = Tim 썸랩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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