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귀은의 괜찮아 사랑이야]
‘마에스트라 차세음’을 살게 하는 것
증상이 정체성을 만든다
tvN 드라마 <마에스트라>에서 주인공 차세음은 자기 확신에 가득차서 말한다. “내가 온 이상 최고가 될 겁니다. 아주 무자비하고, 치열하게.” 이렇게 확신에 가득찬 차세음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그녀의 천재적인 재능일까? 음악을 향한 집념과 사랑일까? 낡은 관행을 파괴하는 합리성과 과감함일까?
아닐지도 모른다. 그녀의 정체성은 ‘레밍턴 병’ 그 자체일 수 있다. 혹은 이 병이 만든 증상일 수 있다. 주인공 차세음은 ‘레밍턴 병’을 앓고 있다. 레밍턴 병은 유전성 신경퇴행성 장애로 몸이 서서히 굳어 가고, 정신도 희미해지고, 기억을 잃어가는 증상이 나타난다. 이 때문에 차세음은 심리적으로는 두려움, 억압, 조급함, 안타까움, 억울함, 고통을 느낀다. 그리고 이 모든 증상은 음악으로 수렴된다. 고통이 음악에 더 전념하게 만든다. 음악에 전념했기 때문에 고통을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증상들이 있었으므로 음악에 더 집착하게 된다. 분명, 차세음에게 레밍턴 병이 없었다면 그녀의 음악도 없었을 것이다. 증상이 차세음을 ‘차세음’으로 살게 한 것이다.
음악에 대한 집착을 더 강화한 것은 자신의 어머니다. 레밍턴 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는 차세음의 미래다. 차세음은 어머니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겪고 있다. 현재의 두려움과 미래의 고통을 동시에 살고 있는 것이다.
증상이 정체성이다. 정체성은 고정된 개념이 아니다. 증상에 따라 ‘내가 나를 어떻게 인식하고 나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가 정해진다. 차세음의 음악에 대한 헌신, 천재적인 능력, 규범과 관례를 무시하는 경향은 그녀의 두려움, 억압, 조바심, 후회, 분노, 고통의 이면이다.
음악엔 ‘완성’이란 것이 없다. 이 끝이 없는 세계는 그녀가 모든 것을 잊고 자신을 갈아 넣을 수 있는 세계이기도 하다. 완성과 끝이 있는 세계라면 그녀에게 음악으로의 도피도 없었을 것이다. 끝없는 음악은 그 자체로 고통이지만, 그 고통이 있기에 레밍턴 병으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모순을 품은 균형
그녀의 건강과 삶은 스스로 통제가 불가능하다. 그녀는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 무력감을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이 또한 음악이다. 음악으로 성취하면 자신이 스스로를 통제한다는 효능감을 갖게 된다. 음악을 할 때에만 자기 안의 혼돈을 관리하고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된다.
그녀의 자살 시도도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통제권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자살은 ‘생명’의 포기지만, ‘삶’에 대한 집착이다. 그녀의 자살 시도는 자아와 삶을 살리기 위한 필사적인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통제권에 대한 절박함은 음악으로 성취를 얻지 못할 경우, 극도의 불안으로 이어진다. 그녀가 자신의 음악에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이유다. 그녀는 남편이 자기 눈앞에서 불륜 행각을 보여도, 그 불륜녀가 임신을 해도, 그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느껴도 묵과할 수 있다.
음악에 대한 집착은 그녀의 관계를 파괴한다. 그녀는 남편과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음악으로 도피한다. 그녀를 붕괴시키는 것도 음악이고, 그 붕괴에서 되살리는 것도 음악이다. 그녀에게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음악에 대한 성취 욕망이고, 그 불안을 관리하게 하는 것도 음악에 대한 열정이다.
그리고 이 모순적인 균형은 깨지기 쉽다. 음악에 의존하면 할수록 더 큰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녀가 음악에 의존하는 동안, 남편이 나돌았고, 과거 연애사는 정리되지 않았으며, 부모와의 관계도 왜곡된 채 방치돼 있었다. 세음에게 균형은 그 자체로 위기였던 것이다.
부모가 자아통합감의 근원이다
자아통합감은 ‘거울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거울 단계란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에 발생하는 중요한 발달 단계이며 이때 자아통합감이 형성된다. 거울 단계 유아는 자신의 신체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얻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온전한 ‘전체’이자 일관된 이미지로 인식한다. 이 전체로서의 이미지가 자아통합감이다. 유아는 자신을 하나의 통합되고 완전하며 이상화된 존재로 보며 환희를 느낀다. 자아통합감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부모나 보호자 또한 이 자신의 통합된 이미지에 흡수된다. 결과적으로, 자신과 타자 사이의 경계도 모호해진다. 자신을 중심으로 한 동일시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성인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런 자아통합감은 자신에 대한 환상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유아기 때 이러한 자아통합감을 갖지 못하면 성장에 문제를 겪을 수 있다. 유아기 때 자아통합감의 경험이야말로 자존감과 건강한 자기애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때 가장 필요한 것이 부모와의 애착관계다.
세음은 어머니와 건강한 애착관계를 갖지 못했다. 그 때문에 건강한 자아통합감을 형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성인이 된 그녀가 겪고 있는 분열감과 과도한 인정욕구는 자아통합감의 부재와도 관련이 있다.
부모가 어린 자녀에 대해 무조건적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거울 단계가 생후 18개월까지라고 했지만, 이 나이는 상대적인 것이다. 오히려 ‘기억’의 관점에서 볼 때, 아이가 부모로부터 무조건적으로 수용된 기억이 충만하다면 ‘자존감’ 교육을 따로 할 필요도, ‘자기애’를 주입할 필요도 없다. 그 기억만으로 아이는 건강한 성인으로 성장한다. 그 기억은 평생 고갈되지 않는 ‘자원’과 같은 것이다.
증상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한 이유
세음에게 정신과 치료가 필요할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더 유의미한 것이 있다. 증상에 대한 재해석이다.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정신의학이나 임상심리학에서 볼 수 있는 전통적 의미의 치료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대신, 증상과 증상에 대한 해석과 이해, 여러 증상들간의 구조를 탐구한다. 그리고 내담자 스스로가 그것을 알게 한다. 상담자는 내담자를 돕는 역할을 할 뿐이다.
세음의 증상은 근절돼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해되고 해석돼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증상에 대한 이해가 자신에 대한 이해로 통합돼야 한다. 그래서 고통조차도 어떤 ‘증상’임을 받아들이고, 그 고통의 의미도 탐구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부모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재정립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증상을 가지고 있다. 사회 속에서 갈등과 긴장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욕망은 억압되고 그 과정에서 증상은 더 심화된다. 그렇다면 이 갈등과 긴장 속에 자신을 방치해야 할까. 무기력하게 상황이 나아지기만을 기다려야 할까. 맹목적 낙관으로 스스로 희망고문을 해야 할까. 삶의 데이터를 해석해 온 사람들은 안다, 상황은 잘 변하지 않는다는 것. 기다려도 봄날은 오지 않는다는 것. 봄날만 기다리다가 세월만 떠나보낸다는 것.
증상의 재해석이 필요하다. 만약 차세음이 자신의 증상을 재해석한다면 더 이상 음악으로 ‘도피’하지 않고, 음악과 함께, 동료와 함께 자기 삶을 ‘새로운 의미’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자신의 음악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그 음악이 증상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또 자신의 증상과 우정과 사랑이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를 ‘해석’한다면 세음은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2024년이 밝았다. 더 나은 삶으로 ‘이동’하고 싶다면, 자기 증상을 ‘이해’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by 한귀은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