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굴삭기, 꼬마 두더지 등 다양한 별칭만 들어도 아이의 구멍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콧구멍, 배꼽, 모래, 볼풀장 등 구멍을 만들 수 있는 곳이라면 가리지 않고 탐색하는 아이들.
왜 이렇게 구멍에 열광하는 걸까? 아이의 속마음을 들여다봤다.
모래 놀이터나 해변에 가면 엄청난 집중력으로 땅을 파는 아이.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놓고는 뿌듯한 표정을 짓는다. 모래뿐이던가.
볼풀장 구석구석을 두더지인 양 마구 헤집어놓고,
키즈카페에서도 편백나무 칩이 가득한 방에 들어가면
나올 생각을 않고 파내기에 여념이 없다.
아이의 ‘구멍 사랑’은 파헤칠 대상의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는데,
해변의 넓은 모래사장뿐 아니라 작은 덩이의 밀가루 반죽, 클레이를 가지고 놀 때도
손가락으로 푹푹 구멍을 내기 일쑤다. 콘센트는 물론 주변의 온갖 구멍에 손가락이나
장난감을 집어넣으려고 해 사고로 이어지는 일도 종종 있다.
심지어 콧구멍, 귓구멍, 배꼽까지 손으로 쑤시며 세상 모든 구멍에 관심을 갖는 아이.
도대체 어떤 심리에서 이런 행동을 하는 걸까.
아이들에게 구멍이란?
구멍은 호기심 천재를 위한 최고의 공간
구멍 속은 어둡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공간이다. 그 속에 무엇이 있을지 상상의 날개를 펴나가다 보면 약간의 공포심과 함께 호기심이 생긴다. 구멍은 통로, 연결 등의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문학이나 영화 등에서 현재의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가는 통로의 이미지로 상징적으로 활용되곤 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를 미지의 세계로 인도한 것도 토끼 굴이었고, <반지의 제왕>과 같은 판타지 세계에서 호빗이 사는 곳도 땅에 난 구멍 속이었다. 또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 <터널>에서도 새로운 세계로 가기 위한 통로로 구멍의 이미지를 활용하고 있다. 아이들은 구멍을 내며 그 속에 무엇이 있을까 상상해보기도 하고, 색다른 존재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한다.
구멍 파기로 세상을 배워가는 중
아이의 인지능력은 몸을 움직이고 주변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차근차근 발달한다. 그리고 아이에게 최초의 탐색 대상은 자신의 몸이다. 몸을 입으로 물고 빨면서 환경과 어떻게 상호작용해야 하는지 배워 나가는데 처음에는 손가락과 발가락을 입으로 탐색한다. 그러다 머리를 가누고 스스로 척추를 세워 앉을 수 있게 되면 손에 자유가 생기면서 활발하게 소근육 활동을 시작한다. 이때부터 콧구멍에 손을 넣거나 입 말고 다른 구멍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우리 몸에서는 콧구멍이야말로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미지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분명 얼굴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내 몸의 일부인데, 고개를 뒤집어 살펴보고 손가락을 넣어 만져봐도 그 안에 무엇이 있고 어떻게 생겼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어디까지 이어져 있을지 호기심이 생겨 장난감을 넣어보기도 하고 손가락을 쑥 집어넣는 모습도 보인다. 이 시기에는 손이 드라이버나 굴삭기를 대신해 다양한 탐험을 하는 도구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림책을 보며 손가락으로 콕콕 찍거나 무언가 파려고 시도하고, 집 안 곳곳에 있는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보기도 한다.
그러다 차츰 활동 반경이 넓어지면서 놀이터의 모래는 무조건 파고 보는 인간 굴삭기로 진화하고, 소근육이 발달해 도구를 사용할 수 있게 되면 연필을 쥐고 물건에 구멍을 내는 사고뭉치로 성장한다. 이런 모습이 부모 입장에서는 걱정될 수도 있지만 다른 탐색 활동처럼 구멍 파기도 아이가 세상을 배워가는 행동 중 하나로 바라보는 게 적합하다.
못 말리는 아이의 구멍 사랑
“구멍은 손끝으로 느끼는 새로운 세상이에요”
돌 전후의 아이들은 시각만으로는 사물이나 공간을 판단하기 어렵다. 대신 신체 움직임이나 손가락의 촉각, 근육 및 관절 감각의 정보를 통해 특정 공간이나 생김새를 느끼는 등 온몸으로 세상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작은 물체를 잡기 위해 엄지와 검지를 사용하거나 눈으로는 보기 힘든 작은 구멍에 손가락을 직접 집어넣어 보면서 또 다른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는 식이다.
만 2세 정도가 되면 아이는 촉각에 대해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이 된다. 물건을 쥐었을 때 손에 닿는 감촉을 느끼며 눈으로는 파악하지 못했던 정보를 촉각을 통해 알 수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이때부터는 피부를 통해 느끼는 신체에 대한 감각적 지각이 시각적 지각보다 사물이나 상황 등을 판단하는 기초 근거로 쓰인다. 아이는 자신의 신체가 어떻게 움직이고 주위 환경이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한 감각적 지각을 얻기 위해 다양한 움직임을 반복하는데, 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는 것 역시 보이지 않는 공간을 촉각이라는 감각으로 탐험하며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구멍 속에 직접 손을 넣어 만져봄으로써 안전한 공간인지 확인하고 구멍 안에는 어떤 세계가 존재하는지 상상의 날개를 펼치기도 한다.
“반복하는 재미가 가득해요”
감각운동기 아이들은 반복을 좋아한다.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 것에 매우 큰 흥미를 보이고 이를 반복적으로 확인하며 즐거움을 느낄 뿐 아니라 학습하기도 한다. 어느 날 구멍에 넣은 손가락이 잘 빠지지 않아 조금 놀랐다가 꼼지락거려보니 빠지는 경험을 했다면, 이는 아이에게 일종의 모험일 수 있고 재미가 될 수 있다. 자기의 행동에 의해 어떤 결과가 바로 나타난다는 것은 아이로서는 더없이 신기하고 재미난 일이다.
특히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뭔가 빼낸 경험이 있다면(콧속 이물질 조차도!) 탐색의 재미까지 더해져 행동이 반복된다. 간혹 콧구멍이나 특정 구멍에 손가락이나 장난감을 넣었다 뺐다 하는 아이도 있다.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의 즐거움, 넣고 뺄 때의 성취감 등에 재미를 느끼고 계속 반복하는데, 그러다가 물건이 콧속에 쏙 박힌 채 빠지지 않거나 손가락이 음료병 입구에 껴 빠지지 않는 경우도 생긴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거치는 통과의례와 같은 경험이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아찔하기만 하다. 이럴 때는 당황하지 말고 가까운 응급실이나 소아청소년과 등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위험한 구멍 파기는 주의!
콘센트에 손가락이나 젓가락으로 쑤시는 등 안전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행동은 제한해야 한다. 특히 발달이 늦고 상호작용이 어려운 아이가 구멍에 과도하게 집착해 몰입한다면 감각이나 사회성 발달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강박적인 행동으로 구멍을 파는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 코피가 날 정도로 코를 후비는 등의 과도한 행동을 할 수 있으므로 주의 깊게 살피고 다른 강박적 행동은 없는지 관심을 갖고 지켜본다.
기획·글 앙쥬 편집부 담당 에디터 류신애, 곽유주(프리랜서) 포토그래퍼 김현철 내용·출처 앙쥬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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