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영건설 불똥에 건설업계가 다 타 죽게 생겼다.”
국내 부동산개발업계를 대표하는 업체의 A 대표는 “태영건설 사태가 건설업계 전반의 신용리스크로 이어져 ‘돈맥경화’가 심화할까 걱정이다”라며 이같이 말했다. 신용리스크는 기업이 채무를 갚지 못한 가능성이 큰 상황이 이르는 상태다. 신용리스크가 커지면 기업은 자금조달 시장에서 조달 비용이 늘고, 이로 인해 만기어음을 연장(롤오버)하지 못하는 상황에 빠질 수 있다. 지난해 태영건설을 비롯해 GS건설, KCC건설, 한신공영, 신세계건설 등의 신용등급이 추락하며 위험 신호가 켜진 상황이다.
특히 자금 사정이 빠듯한 중소 건설업체와 지역 건설업체는 부도라는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울산에 본사를 둔 지역 거점 건설사 세경토건이 지난달 21일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전남에 거점을 둔 거송건설도 지난달 29일 자산 처분이 동결되는 조처를 받았다.
롯데건설 등 대그룹 계열 대형 건설사에도 부동산PF발 위기가 엄슴했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금융권 프로젝트파아니낸싱(PF) 대출 잔액은 134조3000억 원(2023년 9월 말 기준)에 달한다. 지난 2022년 말에 비해 4조 원이 더 늘어났다. 연체율은 2.42%로 지난해 말(1.19%)의 두 배 이상으로 급등했다. 부동산R114는 2024년 부동산 시장 전망 보고서에서 “부동산 PF 부실 폭탄이 현실화할 경우 금융시장이 큰 충격을 받게 된다”고 지적했다. 건설업계와 금융권이 모두 타 죽을 판이라는 말이 엄살이 아닌 셈이다.
부동산, 뿌리 깊고 반복돼 온 부실
레고랜드 사태의 악몽이 재현될 것인가.
시계를 4년 전으로 돌려 보자. 레고랜드 조성 공사에서 상수도와 주변 도로 개발을 담당하던 ‘중도개발공사(GJC)’가 사업비 조달을 위해 2020년 특수목적회사(SPC) ‘아이원제일차’를 세우고 2050억 원의 자산담보기업어음(ABCP)을 발행했다. 이 어음에 대한 지급보증을 강원도가 맡았다. 어음의 담보는 ‘대출채권’이었다. GJC가 아이원제일차로부터 2050억 원을 빌려가면서 발행한 것이다. 어음 만기는 2022년 9월 29일로 정해졌다. 그런데 만기일이 다가오는데도 GJC가 어음을 상환하기 어려워지자, 지급보증을 섰던 강원도가 발을 뺐다. 그해 7월 취임한 김진태 강원도지사가 돈을 갚는 대신 만기 하루 전인 9월 28일 법원에 GJC에 대한 회생신청을 제출했다.
지급불능이 우려되자 2022년 9월 말 신용평가사들이 해당 어음의 신용등급을 위험등급으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일주일 뒤인 10월 5일 아이원제일차와 해당 어음은 최종 부도 처리됐다.
지방자치단체가 지급보증을 철회한 사실은 크레딧 시장에 직격탄이 됐다. 국채나 마찬가지인 강원도가 지급보증한 GJC의 자산유동화어음(ABCP)조차 부도날 수 있다는 불안감에 금융시장은 극도의 혼란을 겪었다.
레고랜드 사태 이후에도 한국의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발 금융시장 불안을 경고하는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레고랜드 사태 이후 정부와 한국은행의 유동성 지원으로 위기는 일단락됐지만 금리 인상과 부동산 가격 하락 속에 채무불이행 사태가 재발할 우려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해 4월 글로벌 금융안정보고서에서 비은행 금융사의 위험을 거론하면서 레고랜드발 회사채 시장 위기를 서술했다. IMF는 “한국의 경우 PF 대출은 자금 구조가 취약하고 만기 불일치도 상당하다”며 “한국 PF 대출 연체율이 정점에서 더 오를 가능성은 낮지만 부동산 가격 하락 등 역풍이 계속되고 있어 위험 요인이 있다”고 지적했다. IMF는 지난해10월에도 “비은행 금융기관을 모니터링하고 건전성을 규제해야 한다”고 했다.
잇따른 경고에 정부와 한은, 금융 당국도 국내 PF 관련 리스크를 주시했다. 고수익을 노리고 최근 수년간 대규모 PF 대출에 나섰던 증권사나 저축은행, 상호금융권 등에서 연체율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조적인 리스크를 막는데는 한계였다. 결국 ‘불의 고리’라 불리는 태영건설 PF사태가 금융시장을 흔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외국계 은행인 씨티은행, S&P등은 부동산발 위험을 경고하면서도 부동산PF가 금융권 시스템 리스크로 옯겨갈 가능성을 제한적으로 본다.
하지만 13년 전 악몽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다. 부동산 투자 위기를 이기지 못해 저축은행이 줄도산했다.
태영사테, 위기로 갈 것인가
증권가에 따르면 올해 위기설은 2021년 8월 기준금리 인상 이후 약 1년 주기로 부동산 PF 관련 이슈가 발생했다는 점에서 시작됐다. 고금리 상황으로 채무 상환 능력이 악화하면서 PF발(發) 유동성 위기와 정부 대응 과정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실제 2022년 11월 레고랜드 사태 1년 뒤인 지난해 10월, 채권시장안정펀드(채안펀드)가 가동됐고, 그로부터 1년 뒤인 올해 다시 위기가 발생할 것이란 분석이 나오고 있다. 올해는 5~6월 태영건설발(發) 부동산 PF 위기가 서서히 고조되면서 하반기 건설사 줄도산 등으로 번진다는 분석이 중론이다. 태영건설의 1차 채권단협의회는 이달 11일, 2차 협의회는 총선 다음날인 4월 11일로 예정돼있어서다.
문제는 PF 리스크가 본격화하면 한국 경제 전반에 타격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다. 만일 워크아웃(기업구조개선)에 실패해 태영건설이 법정관리(기업 회생절차)에 들어가면 채권단은 물론 태영건설의 협력업체, 동종업계 건설사, 태영건설이 시공 중인 아파트 분양계약자 등에게 연쇄 위기로 번질 수 있다.
당장 태영건설의 유동성 위기로 증권업계에서는 롯데건설과 동부건설에 대한 우발채무 우려가 커지고 있다. 두 건설사 모두 “유동성에 문제가 없다”고 밝히며 해명에 나섰지만, 건설사 줄도산에 대한 우려는 커지고 있다. 이미 신용등급이 부여된 건설사 21곳 중 PF 위기로 등급이 하향 조정된 건설사도 8곳에 달한다.
건설사에 자금을 빌려준 금융권도 문제다. 특히 금융당국에 따르면 증권사는 부동산 PF 연체율이 13.85%에 달해 금융업권 중 가장 높다. PF 부실화 우려 속 일부 증권사는 신용보강금액을 늘리기도 했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주요 국내 증권사 10곳의 지난해 신용보강금액은 28조950억 원으로 2022년보다 26% 가까이 줄었지만, 메리츠증권과 대신증권은 증가했다. 두 증권사의 신용보강금액은 각각 9조2088억 원, 1조7685억 원으로, 2021년 대비 26.2%, 185.33% 늘었다.
태영건설이 시공한 아파트 데시앙 계약자들도 불안에 떨고 있다. 이들은 온라인 카페 등에서 시공사 변경으로 공사가 지연되는 등 향후 차질이 빚어질 경우 대응책을 논의 중이다. 한 데시앙 입주예정자는 “기간이 늘어날수록 이자와 기회비용 날리는 건 감안해야할 것 같다”며 토로하기도 했다. 태영건설이 공사 중인 주택사업장 중 분양된 곳은 총 22곳, 가구 수는 1만9869가구에 달한다.
이 밖에 태영건설의 협력업체 581곳의 피해가 예상되는 등 사회 전반으로 우려가 확산 중이다.
이경자 삼성증권 연구원 “정부와 채권단은 태영건설이 더욱 적극적인 자구안을 내놓고 이행해야 한다는 입장이며, 이에 대한 의견 차이를 해소하지 못할 경우 워크아웃 진행 여부가 불투명해질 수 있다”며 “금융시장은 신뢰가 최우선이라, 워크아웃 무산 시 PF와 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커질 수 있다”고 했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부동산 PF 위기가 반복된다는 점에서 국가 재정과 시장의 역할 및 기능이 재정립되어야 할 시점”이라며 “정부 지원으로 위기를 넘기는 중요하지만, 위기가 반복되지 않도록 강경 대응을 병행해 ‘배째라’식 문화를 없애야 한다”고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