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박혜원 기자] #. “내가 죄가 많다….” 지난달 말 밤 12시께, 구로경찰서의 한 지구대에 술에 취한 60대 남성이 들어와 이렇게 말했다. 이 남성은 자신의 죄명을 직접 밝히진 않았으나 지구대에 한참을 머물렀다고 한다. 신원 조회 결과 이 남성은 A급 지명수배자로 나타나 즉시 체포됐다. 이 남성은 5개월 전 고깃집에서 한 차례 6만원가량의 무전취식을 한 뒤 잠적한 상태였다. 경찰 관계자는 “지명수배자로 조회돼 즉시 조사했으나 금액이 경미해 불구속 입건으로 조사 중”이라고 말했다.
한 해에만 7000명가량의 A급 지명수배가 발생하는 가운데 경찰들 사이에선 소액 경범죄 사범에 흉악범까지 포함된 지명수배 검거에 부담을 겪는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경찰 수사권 조정에 과중된 경찰 업무에 수 년간 누적된 인력난 문제에 따른 호소의 연장선상이다. 일각에선 지명수배 요건을 강화하거나, 고소·고발 문턱을 높여 민간 수사영역을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A급 지명수배는 수차례 경찰 조사에 불응하거나 잠적 상태가 된 범죄자에 내려지는 조치다. 지명수배자로 지정되면 전국 수사기관에 범인을 추적·체포·인도해야 한다는 의뢰가 통보돼 즉시 체포가 가능하다. 지명수배 전 단계로 체포영장이 발부되지 않은 C급 지명통보나, 벌금미납자에 주로 내려지는 B급 벌금수배보다 높은 소치다.
한 해 발생하는 A급 지명수배자는 6000~8000명가량이다. 송재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경찰청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에는 6843명의 지명수배가 발생했다. 이중 절반가량인 3516(51.3%)명이 사기·횡령 사범으로 가장 많았다, 그 다음으론 절도 587명(8.5%), 폭력 431명(6.2%) 등 순이었다. 연도별로 보면 2019년 8559명, 2020년 8817명, 2021년 7105명의 A급 지명수배가 내려졌다,
잘 알려진 A급 지명수배자로는 과거 강도살인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으나 탈옥한 신창원 등이 있다. 최근에는 해양경찰이 도주치상 후 잠적했던 남성을 제주도로 입항하는 어선에서 검거하기도 했다. 전 펜싱 국가대표 남현희 씨와 결혼을 발표했다 각종 사기 혐의가 알려지며 현재 경찰 수사를 받고 있는 전청조의 부친 역시 16억대 사기 혐의로 지명수배가 됐다는 의혹도 나왔다.
일선 경찰 사이에선 경범죄사범부터 강력범죄까지 포함된 지명수배 검거가 업무 과중을 더하고 있다는 호소도 나오는 상황이다. 서울 소재 경찰서의 한 형사과 관계자는 “경찰서 성과평가 요건에 지명수배자 검거자 수도 포함돼 있다”며 “경찰서마다 할당된 지명수배자 수가 있어 이들을 검거하기 위해 직원들이 받는 압박이 큰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일각에선 흉악범죄에 대한 검거 효율화를 고려해 지명수배 요건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창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경찰에 수사 부하가 걸려있는 상황에서 지명수배 부담까지 더해 인력 낭비가 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한 경찰 관계자는 “수사 처리 절차에 있어 경찰의 재량권이 사실상 없는 상황”이라며 “해외와 같이 민사소송 등 변호사나 탐정이 맡는 민간 수사영역을 강화해 고소·고발 문턱을 낮출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지명수배 제도 변화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이에 따른 부작용 역시 고려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한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지명수배 검거로 인한 인력낭비 우려가 있는만큼 제도 보완 필요성이 있긴 하나, 이로 인해 범죄자가 제대로 잡히지 않으면서 사회적으로 범죄가 늘어나는 가능성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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