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시 수낵 영국 총리가 지난 2일(현지시간) 슈퍼컴퓨터 도입에 대해 직접 언급했다. 수낵 총리는 자신의 X(트위터) 계정을 통해 영국 과기부의 신형 슈퍼컴 도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인공지능(AI) 모델이 점점 강력해지고 있다. 이번 투자는 영국의 과학이 가장 진보한 AI 안전 모델을 만드는 데 필요한 도구를 가지게 할 것이다. 슈퍼컴퓨터는 AI 안전 분야에서 영국의 입지를 강력하게 할 것이다.”
영국 총리가 정치, 경제 현안도 아닌 슈퍼컴퓨터 개발에 대해 직접 언급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수낵 총리는 자신이 직접 구상한 ‘제1회 AI 안전 정상회의’를 계기로 대규모 슈퍼컴퓨터 도입에 방점을 찍었다. AI 시대 주도권을 잡는 데 슈퍼컴퓨터가 필요함을 공언한 셈이다. 수낵은 AI의 안정성과 신뢰성에 대한 국제사회의 논의를 제안하면서 동시에 자국 내 대규모 투자에 대한 근거를 마련했다.
이번 투자를 통해 영국은 케임브리지와 브리스틀에 각각 새로운 슈퍼컴퓨터를 설치할 예정이다. 새 슈퍼컴은 현재 영국 최대 규모의 공공 AI 컴퓨팅 용량의 30배가 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평이다. 슈퍼컴이 가동되는 내년이면 영국은 AI 개발을 위한 강력한 지원군을 얻는다.
일론 머스크의 테슬라도 최근 전기차가 아니라 ‘도조’라는 이름의 슈퍼컴으로 이목을 끌었다. 투자은행 모건 스탠리는 테슬라가 자율 주행 학습에 사용하는 도조가 테슬라의 시장가치를 5000억달러(약 665조5000억원)가량 불어나게 할 수 있다고 예상해 시장의 이목을 끌었다. 테슬라는 대량의 자율주행 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해 슈퍼컴을 개발하고 있다.
이처럼 슈퍼컴퓨터는 세계 각국의 국력과 기업의 역량이 그대로 반영되는 특징이 있다. 영국도 이번에 확보한 슈퍼컴퓨터를 AI는 물론 신약개발 청정에너지 분야의 혁신을 주도하는 데 사용할 예정이다. 영국은 지난 6월 발표된 세계 슈퍼컴퓨터 국가별 보유 순위에서도 미국·중국·독일·일본·프랑스에 이어 6위권에 있지만 더 높은 순위를 목표로 한다.
슈퍼컴은 전통적으로 미국이 주도했다. 미국은 슈퍼컴퓨터에 사용되는 핵심 CPU와 GPU를 개발하고 있다. 이를 클러스터링으로 묶는 기술 역시 앞서있다. 중국은 신흥강자를 넘어 미국을 압박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다만 최근의 대중 반도체 수출 규제로 중국 슈퍼컴퓨팅 능력의 성장에는 적신호가 켜진 상태다.
◇GPU 값 치솟으며 국내 슈퍼컴퓨터 6호기 도입 차질= 슈퍼컴퓨터 순위를 매기는 톱500 리스트에 따르면 미 오크리지국립연구소 프런티어가 선정, 세계 슈퍼컴퓨터 성능 순위를 매기는 톱500의 11월 순위표가 공개됐다. 올해 6월 선두로 등극한 오크리지국립연구소의 엑사급 슈퍼컴퓨터 ‘프런티어’가 1위를 유지했다.
국내에서는 삼성종합기술원의 ‘SSC-21’(20위) ‘SSC-21 스캘러블 모듈’(387위), 기상청의 ‘구루’(37위) ‘마루(38위)’, SK텔레콤의 ‘타이탄’(47위),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의 ‘누리온’(49위), KT의 ‘케이티 디지엑스 슈퍼피오디’(58위), 광주과학기술원(GIST)의 ‘드림-AI’(207위) 등 8대가 슈퍼컴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슈퍼컴퓨터는 수명이 다하면 교체해야 한다. 매번 대규모 자금이 필요하다. 슈퍼컴퓨터는 인텔, AMD 등의 범용 중앙처리장치(CPU)를 대규모로 클러스터링(병렬연결)해 제작되고 있다. 그런데 그래픽처리장치(GPU)가 핵심 부품으로 부상하며 상황이 달라졌다.
생성형 AI 챗GPT의 등장 이후 엔비디아의 GPU를 구하기 힘들어진 데다 가격도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까지 치솟았다. 엔비디아의 최신 GPU는 약 3만달러를 넘는다. 이런 GPU를 적게는 수백 개, 많게는 수천 개까지도 사용해야 제대로 된 슈퍼컴이 완성된다.
이번에 영국이 설치하기로 한 HP의 슈퍼컴 ‘이삼바드 AI’ 슈퍼컴에는 엔비디아의 고급 AI 칩이 5000개나 사용된다. 이를 위해 영국도 기존 1억파운드였던 슈퍼컴 도입 예산을 200%나 증액해야 했다.
독일과 프랑스는 손을 맞잡았다. 두 나라는 유럽연합(EU) 최초의 엑사스케일 슈퍼컴퓨터 도입을 위한 ‘쥬피터’ 프로젝트에 공동협력하기로 했다. 쥬피터 컴퓨터 자체에만 총 2억7300만유로(약 3866억원)가 소요된다. 쥬피터는 초당 10억개의 계산 임계값을 초과하는 유럽 최초의 시스템으로 기후 변화, 전염병, 핵융합 에너지와 같은 분야의 계산에 투입될 예정이다. AI 분야에서도 맹활약할 것으로 기대된다.
당장 GPU 가격 폭등의 불똥은 우리에게도 떨어졌다. KISTI가 추진 중인 슈퍼컴 6호기 도입이 위기다. 기존 5호기 ‘누리온’의 후속으로 2021년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해 2999억원의 예산이 배정됐고 내년에는 설치가 이뤄져야 한다.
6호기는 25.7PF(페타플롭스·초당 1000조번 연산 처리) 성능을 보였던 ‘누리온’보다 약 20배 빠른 600PF급 연산 능력을 갖추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수차례 입찰에도 응한 기업이 없다. 이 정도 예산으로는 치솟은 GPU값을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기업들은 6호기 도입에 응찰하지 않고 있다. 원·달러 환율까지 치솟으며 필요한 예산은 더욱 늘었다. 이 때문에 KISTI는 3차 입장 공고에서는 요구 성능까지도 낮췄다.
KISTI는 세 차례의 입찰 공고가 모두 무위로 끝날 경우 단독 응찰이 가능한 4차에서 도전 기업이 나올 수 있다고 예상하지만 GPU 품귀와 가격 상승 부담을 안고 도전할 기업이 나올지는 미지수다. 가격을 맞춰 준다고 해도 제때 납품이 이뤄질지도 알 수 없다. 고급형 GPU는 돈을 준다고 바로 구입할 수도 없다.
김재수 KISTI 원장도 지난 8월 슈퍼컴 도입 35주년 행사에서 “슈퍼컴퓨터 6호기 도입은 필수지만 GPU 가격 폭등, 금리 인상, 고환율 등 최악의 환경을 맞이했다”고 말했다.
이미 예산은 부족하고 구매 시점도 늦어졌다.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예산을 증액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내년 도입이 이뤄질지는 확실치 않다. 이미 학계에서는 슈퍼컴 도입 지연으로 인한 연구 사기 저하를 우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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