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덕종 시절인 AD 787년은 수년래 최고의 풍년이었다. 한 말에 수천 전 하던 쌀값은 150전 아래로 떨어졌고 좁쌀 가격도 80전으로 추락했다. 덕종 황제는 조서를 내려서 쌀을 수매하는 조치(和籴·화적)를 내렸다. 재임한 지 10여 년 동안 반란군에 시달리며 두 번이나 장안에서 쫓겨났던 덕종으로서는 오랜만에 누려보는 태평성세였다. 그해 겨울 삼문협 부근으로 사냥을 나갔던 덕종은 민가에 들러 조광기라는 백성에게 생활이 편안한지를 물었다. 당연히 편안하다고 대답하기를 기대했던 덕종은 깜짝 놀랄 말을 들었다. 백성들이 전혀 즐겁지가 않다는 것이었다. 금년 농사가 대풍인데 어찌 편안하지 않은지를 되묻자 그의 대답이 이랬다.
첫째, 황제의 명령, 즉 조서는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전에 황제가 양세, 즉 봄의 재산세와 가을의 요역세 외에는 모든 잡세금을 없앤다고 했지만 세금 외로 뜯어가는 주구(誅求)가 세금보다 더 많다는 것이었다. 둘째로 가격이 하락한 쌀을 비싸게 사들인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강제로 빼앗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한 푼도 ‘더’ 만져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셋째, 처음 말하기에는 수매를 도로변에서 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수십 리 떨어진 관청으로 싣고 가야 되므로 수레가 깨어지고 소가 죽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현실이 이런데도 정부는 황제의 조서를 내려 매번 즉시 구제했다고 떠들지만 죄다 허황하고 실정 모르는 공문서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면서 아마도 황제께서 구중심처에 거하셔서 현장 물정을 모르기 때문 아니겠냐고 꼬집었다. 놀란 덕종은 그 집에 부역세를 면제해 주라는 조치를 내리고 돌아왔다. 이런 덕종의 조치를 역사가 사마광은 신랄하게 비판했다. 국정이 겉도는 근본 이유를 파악하지 못한 덕종의 아둔함을 맹렬히 비난했다.
사마광은 국정 난맥상의 근본 이유는 ‘막힘’이라고 지적했다. 인군의 은택이 막혀서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고 또 서민들의 억울한 사정들이 위로 닿지 못하는 막힘 때문에 군주가 위에서 근면하게 긍휼을 베풀어도 아랫사람들이 못 느끼게 되고 아래 백성들의 어려움이 황제께 알려지지 못하므로 민심이 이반되고 결국에는 반란으로 이어져 나라가 망하기까지에 이르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런 ‘구조적인 막힘’을 풀지 않고 그저 개인의 세금이나 면제해주려 했던 덕종의 조치는 천재일우(千载之遇), 즉 1000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우연에 불과하다는 비판이었다. 사마광은 무엇보다도 먼저 구조적인 막힘을 푸는 조치를 요구했다. 즉, 황제 조서가 왜 제대로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는지를 수사하고 아래 백성들을 잔혹하게 부리거나 각종 조세를 과도하게 부과하거나 공공재물을 도둑질하고 은닉하는 행정관료를 엄단하기를 촉구했다. 특히 풍년으로 백성들이 태평성세를 누리고 있다고 황제 좌우에서 허황하게 아첨하는 무리들을 주살할 것을 촉구했다. 그런 다음에 덕종 스스로가 마음을 깨끗이 씻어 고쳐서 정치를 일신한 다음 떠벌리거나 가식적인 것을 버리고 허황한 문서들을 폐하며 조정 명령을 근엄하게 내리되 신뢰를 돈독히 얻도록 노력하며 진위와 충성과 사악함을 잘 분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백성들의 곤궁함을 가엽게 생각하여 원망이 쌓이면 즉각 적절한 조치를 내리고 형벌 판결이 적체되어 원한이 누적되면 즉시 시정하여 고쳐주면 태평의 대업이 가능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런 일은 하지 않고 한 집안의 부역 부담만 없앴으니 수천만 리 억조 백성의 어려움을 일일이 해결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지금 상황도 1500년 전 당나라 때와 별로 다르지 않다. 지금도 여전히 구조적인 ‘막힘’이 존재한다. 하나는 밑에서 올라오는 것의 ‘막힘’이 있다. 즉,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의 현장 경제가 어디서 얼마나 어려운지를 정부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막힘이다. 지난번 밝힌 바대로 제조업과 서비스업 절반 이상이 2019년 생산 수준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용직이나 특수고용직 소득 형편도 2019년보다 훨씬 열악하다고 보면 틀림없다. 이런 현장 상황은 무시한 채 2021년 4.1%와 2022년 2.6% 경제성장률만 쳐다보고 경제가 회복되었다고 떠드는 것은 1500년 전 대풍 때처럼 심각한 ‘막힘’이다.
또 다른 막힘은 정부의 조치가 제대로 내려가지 못하는 아래로 내려가는 막힘이다. 윤석열 정부 120대 정책과제 중 첫 번째 국정과제가 코로나 피해 소상공인과 자영업자의 완전한 회복 지원이다. 정부 출범 당시 소상공인 코로나 피해 지원을 국정과제의 제1장 제1절 과제로 삼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정이다. 작년 5월 11일 당정 합의를 거쳐 5월 29일 국회에서 확정된 ’33조원+알파 추경’의 핵심은 예산 약 30조원을 들여 연 매출 50억원 이하인 400만개 소상공인에게 매출 감소율에 따라 최소 600만원에서 최대 1000만원까지를 지급하는 것이다. 그 다음 날인 5월 30일 정부는 약 3조원의 ‘긴급민생안정 10대 프로젝트’도 발표했다. 230만가구에 대해 최대 100만원의 긴급생활안정자금을 지급하고 학자금 대출금리를 1.7%로 동결하며 자동차개별소비세 30% 적용을 연말까지 연장하며 2021년 공시가격을 적용함으로써 재산세와 종부세 부담을 완화하는 내용 등을 담았다.
당시 정부로서는 재정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할 만큼 한 것이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국민이 현장에서 얼마만큼 체감하는 지원이었는지를 확인하는 일이다. ’33조원+알파’ 집행 과정에서 나타난 현장 반응과 문제점이나 보완점에 대한 성찰과 보고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제대로 필요한 사람에게 자금이 내려가는지, 부족하지는 않은지, 부족하면 얼마가 어디서 부족한지, 개선할 점이 무엇인지를 꼼꼼히 따져서 보완하는 것이 향후 소상공인 지원잭을 보다 더 완벽하게 완성하는 일일 것이다. ‘아래로의 막힘’을 여는 것이다. 양세법을 철폐한 줄 알았더니 현장에서는 또 다른 가혹한 착취가 있었던 것처럼 현장에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지원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못 받은 사례가 없었는지, 금액이 충분했는지 파악하는 것은 지원 자체보다도 더 중요하다.
윤석열 정부의 2022년 6월 16일 ‘새 정부 경제정책 방향’은 정부 관료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과 기업을 위해 있는 것이다. 제1 목표인 규제 혁파와 투자 확대, 공정한 시장질서 확립도 국민과 기업을 위해 있는 것이고 제2 목표인 연금 개혁, 노동시장 개혁, 교육 개혁, 금융서비스시장 개혁도 국민을 위한 개혁이다. 제3 목표인 과학기술 R&D 투자 혁신과 국가첨단전략산업 육성도 국민을 위한 것이고 제4 목표인 지역균형발전과 복지시스템, 사회안전망 구축도 국민을 위한 것이다. 모든 개혁과 정책의 중심에는 ’국민과 기업‘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정부의 움직임을 보면 국민은 보이지 않고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만 보인다. 그것도 이름하여 ’전략회의‘다. 전략회의다 보니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 정예 관료 중심 회의체가 되었다. 2022년 6월 14일 ‘규제혁신 전략회의’, 7월 7일 ‘국가재정 전략회의’, 11월 23일 ‘수출 전략회의’, 12월 21일 ‘신성장 4.0 전략회의’ 그리고 2023년 2월 1일 ‘인재양성 전략회의’가 그런 것들이다. 그 위에 거의 격주로 비상경제민생회의와 국정과제 점검회의가 개최되고 있다. 셀 수도 없는 위원회와 그 위원회에서 열리는 천문학적인 회의까지 합하면 거의 빅데이터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엘리트 관료 중심의 이런 회의나 위원회는 막힘을 풀기 위해 열리는 것이겠지만 실상은 오히려 막힘의 근본 원인이 되고 있음을 모르는 것 같다. 첫째로 관료들의 당면 관심은 국민을 위한 문제의 근본 해결이라는 형식을 덮어 쓰고 대부분 자신의 영달을 위해 인사권자 눈에 자주 비치기를 바라는 것이다. 둘째로 그들은 국민들이 현실 문제를 지적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장에 문제가 없거나 잘 풀려나간다는 것을 인사권자에게 보여 주기를 원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회의의 중심 과제는 국민의 문제 해결에 있지 않고 자신의 능력 과시 혹은 현실 문제 감추기와 자신의 무능력 감추기에 집중하다 보니 ’위·아래 막힘‘의 근본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것을 푸는 열쇠는 대통령에게 있다.
신세돈 필자 주요 이력
▷UCLA 경제학 박사 ▷한국은행 조사제1부 전문연구위원 ▷삼성경제연구소 금융연구실 실장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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