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 안 내리고 용량 줄이는 기업 잇따라…”소비자에게 알려야”
브라질은 용량 변경 때 포장에 고지…프랑스도 입법 검토
정부 “업계 유념해달라”…기업들 “가격인상 눈에 띄니 어쩔 수 없이 용량 줄여”
(서울=연합뉴스) 김윤구 신선미 기자 = 초등학교 3학년 딸을 둔 A씨는 지난달 집에서 핫도그 봉지를 뜯다가 당황했다.
딸아이의 간식으로 항상 주문한 이 핫도그는 한 봉지에 5개가 있어야 하는데 이날은 4개뿐이었다.
그는 8일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패키지도 그대로 가격도 그대로인데 5개가 있던 것이 4개 밖에 없었다”면서 “용량이나 개수 표기는 잘 보이지 않아 몰랐다”고 말했다.
A씨는 딸의 간식으로 늘 사던 제품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풀무원의 ‘탱글뽀득 핫도그’였다.
지난 7일 서울의 한 이마트에서 이 핫도그는 4개(총 400g)에 8천980원에 팔리고 있었다.
이전에는 5개(500g)가 들어있던 것이 1개가 빠졌다.
이마트 기준 풀무원 탱글뽀득 핫도그의 10g당 가격은 225원이었다. A씨 같은 소비자가 이전처럼 5개를 먹으려면 2천250원을 더 지불해야 하는 셈이다
풀무원 관계자는 “원재료 가격 폭등과 인건비 상승 영향으로 부득이하게 수량을 조정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가격을 올리는 대신 제품 개수를 줄인 것에 대해서는 “사업부에서 여러 가지 요인을 고려해서 결정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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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가 시대를 맞아 제품 가격 인상도 줄을 잇고 있지만 기업들이 가격은 그대로 두거나 올리면서 제품 용량을 줄이는 이른바 ‘슈링크플레이션'(Shrinkflation) 사례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슈링크플레이션은 양을 줄인다는 뜻의 슈링크(shrink)와 물가 상승을 뜻하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의 합성어다.
슈링크플레이션이라는 용어는 최근 몇 년 사이 회자했지만, 제품 용량 줄이기의 역사는 오래됐다. 예를 들어 과자의 양을 줄이고 대신 질소를 더 채우는 ‘질소과자’가 문제가 된 것도 벌써 10년이 넘은 일이다.
적지 않은 기업이 지난해와 올해 가격을 내리지 않고 용량을 줄여왔다.
동원F&B는 올해 양반김 중량을 5g에서 4.5g으로 줄였고 참치 통조림 용량도 100g에서 90g으로 낮췄다.
오비맥주는 지난 4월 카스 맥주 묶음 제품을 1캔당 기존 375㎖에서 370㎖로 5㎖씩 줄였다.
서울우유협동조합은 작년 9월 유제품 비요뜨 중량을 143g에서 138g으로 줄였다.
오리온은 지난해 9월 초코바 핫브레이크 중량을 50g에서 45g으로 줄였다.
롯데웰푸드 카스타드는 12개에서 10개로, 꼬깔콘은 72g에서 67g으로 각각 줄었다. 롯데칠성음료 델몬트 오렌지주스는 과즙 함량이 100%에서 80%로 낮아졌다. 농심은 오징어집을 83g에서 78g으로, 양파링은 84g에서 80g으로 각각 축소했다.
CJ제일제당은 이달 초부터 편의점용 냉동 간편식품 ‘숯불향 바베큐바’ 중량을 280g에서 230g으로 줄였다. 다만 이에 대해 CJ제일제당 측은 “OEM(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 업체를 바꾸면서 제품 스펙(재료 배합비)이 바뀐 것”이라고 해명했다.
‘슈링크플레이션’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미국에서도 지난해 식품과 음료에서 두루마리 휴지까지 다양한 품목의 ‘슈링크플레이션’을 다루는 보도가 집중적으로 나왔다.
지난해 유니레버는 도브 비누의 중량을 100g에서 90g으로 줄였다.
버거킹 치킨너겟은 10조각에서 8조각으로 2조각 줄었다.
게토레이는 용량이 32온스에서 28온스로 14% 줄었다. 페트병 모양이 일자에서 가운데가 푹 들어가게 바뀌면서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식당 평점 사이트 옐프는 지난해 소비자들이 처음으로 리뷰에서 ‘슈링크플레이션’을 언급하기 시작했다면서 핫도그, 햄버거, 피자 등 업종에서 양이 줄었다고 불평하는 소비자들이 많았다고 밝혔다.
식품 기업이나 식당 업주 등이 양을 줄이는 것은 가격을 올리는 경우보다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양을 줄이더라도 포장지에 작게 적혀있는 중량까지 꼼꼼하게 확인하는 소비자가 아니라면 모르고 넘어가는 일이 많다.
풀무원 핫도그 개수가 줄었다고 토로한 A씨는 “용량이 바뀔 때는 당연히 소비자에게 고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선 기업들이 제품 용량을 줄여도 이를 소비자에게 알릴 의무가 없지만 브라질에선 변경 전과 후의 용량, 용량 감소 비율을 포장에 표시해야 한다.
프랑스 슈퍼마켓 체인 까르푸는 지난 9월 가격 인하 없이 용량이 작아진 제품에 ‘슈링크플레이션’ 스티커를 붙이기도 했다.
브뤼노 르 메르 프랑스 재무장관도 용량을 변경할 때 소비자에게 고지하는 것을 의무화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치솟은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식품업계에 가격 인상 자제를 요구해온 우리 정부도 ‘슈링크플레이션’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권재한 농림축산식품부 농업혁신정책실장은 “식품업계가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슈링크플레이션’에 대해 소비자가 우려하고 있으니 업계가 이를 유념해달라고 계속 당부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올해 제품 용량을 줄인 한 식품업체 관계자는 “원가 압박으로 가격을 올리거나 용량을 줄일 수밖에 없는데 가격을 올리면 집중포화를 받는다. 용량 줄이기는 소비자 체감이 덜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현 정부의 물가 관리 강화를 언급하며 “모든 업체가 눈치 보기를 하고 있다. 가격 인상은 너무 눈에 띄니 어쩔 수 없이 중량을 조절할 수밖에 없다”면서 기업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ykim@yna.co.kr, s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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