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아시아경제는 국내외 각계각층에서 활약하고 있는 여성을 ‘파워 K-우먼’으로 선정해 지난달 24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2023 여성리더스포럼’을 통해 발표했습니다. 이들은 성별·인종·장애·가난 등 장벽에 굴하지 않고 경계를 부수거나 뛰어넘어 새롭고 보편적인 가치를 창출한 여성 리더들입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지친 세상에 위로를 주고, 누군가의 롤모델로 자리 잡아 공동체가 나아갈 힘을 줄 것입니다. 차별에 위축되거나 경계에 갇히지 않고 맞서 싸운 사람들을 파워 K-우먼 후보로 뽑아 소개합니다.
“경력 단절은 생각보다 주변에서 더 많이 일어나고 있어요. 고위직으로 올라갈수록 여성을 찾아보기가 더 어려워요.”
여성가족부 출범 이래 첫 여성 차관. 이복실 전 여성가족부 차관은 유리천장을 극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단지 ‘버티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 여성이 공무원 사회에서 고위직에 오른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 진입 자체가 어려운 때였다. 특히 엄마가 된 이후에 사회생활은 더욱 고됐지만, 그만큼 그가 일궈온 것에 소중함을 느끼게 됐다. 그런 그는 이제 제3의 삶을 개척하면서 후배들이 더 편히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기 위해 기꺼이 디딤돌로 나섰다.
‘행시 4번째 여성 합격자’에서 차관까지
이 전 차관은 학창시절부터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마음 먹었다. 이토록 굳건한 마음을 갖게 된 건 그가 어머니의 삶을 오롯이 지켜봐왔기 때문이다. “여성이 경제력이 없으면 결국은 종속당하고 의사결정 과정에서도 복종할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1980년대에 민간기업들은 공개 채용으로 여성 직원을 선발하지 않았다. 별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여긴 그는 행정고시 준비를 선택했다. 그렇게 2년여의 준비 끝에 역대 4번째 여성 행정고시 합격자라는 수식어를 얻게 된다.
하지만 그 시절엔 공무원의 삶도 녹록지 않았다. 당시 문교부(현 교육부) 소속 사무관이 됐지만, 남성 중심의 공무원 집단에서 원하는 만큼의 성장을 이루기 어렵다는 것을 몸소 체감했다. 당시 유학에서 돌아온 그는 상사로부터 ‘본부에는 여성 사무관이 셋이면 족하다’라는 모욕에 가까운 말도 들었다고 한다.
9년여를 버틴 그가 선택한 우회로는 지금의 여성가족부인 정무장관실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잘한 건지 잘못한 건지는 모르겠어요. 그래도 나를 알아주는, 내 능력에 맞는 보직을 줄 수 있는 곳으로 가자고 생각했어요.” 그는 여가부에서 여성특별위원회 총무과장, 여성부 기획관리심의관 등을 거쳐 보육정책국장에 올랐다. 이후 청와대에 입성해 행정관을 역임한 그는 박근혜 정부에서 여가부 차관에 올라 2013년부터 2014년까지 차관을 지냈다.
엄마로서 그는 일을 몇번이나 포기해야 하는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결혼하기 전에는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게 ‘능력’이었지만, 결혼하고 난 이후 그의 삶은 180도 달라졌다고 말했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들을 떼어놓고 나온 만큼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 그만큼 자랑스러운 엄마가 돼야겠다고 다짐했다. 다른 이들보다 유독 힘들게 올라왔던 그는 공무원의 삶과 엄마로서의 삶을 모두 포기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여기까지 오느라고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생각하면 그만둘 수 없었어요. 어떻게든 여기서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딸들을 위해 나선 여성 리더들
30년의 공직생활을 마무리한 이 전 차관은 세계여성이사협회장을 맡으며 인생 2막을 시작한다. 7년 전 그는 여성 CEO들과 힘을 합해 세계여성이사협회 창립 멤버로 활동했다. “세계적인 NGO(비정부기구) 단체인 세계여성이사협회가 전세계 80개 나라에 지부가 있는데 당시에는 한국에 지부가 없었어요. 가입하려고 보니 이사회에 들어간 여성이 우리나라엔 없는 거예요.” 그렇게 수소문을 해서 36명의 여성 이사가 모였다. 이들은 스스로 여성들의 경영 참여를 활성화할 수 있는 플랫폼이 되기를 다짐한다.
“우리의 딸들을 위해 우리가 나서자.” 다들 현업에 몸담고 있던 이들이 무보수로 나선 계기였다. 전략분과장을 맡았던 시절 이 전 차관은 협회 회원들과 함께 법 개정을 추진했다. 상장기업 이사회에 여성 이사 의무화를 도입하는 이른바 ‘여성 이사 의무화법(자본시장법 개정안)’이다. ‘한국에서는 왜 여성 이사들이 없나’라는 문제 의식에서 출발한 행동이었다. 그 과정에서 정부부처 출신으로 국회 입법 과정에 대해 잘 알았던 그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논의 과정에서 선언과 의무로는 구속력이 없다고 말했어요. ‘구속력 있는 법에 넣자’라는 생각에 자본시장법 개정을 추진하기 시작했어요.”
이 전 차관이 가장 먼저 떠올린 건 ‘강력한 헬퍼’였다. 의원실마다 찾아가 설득한 끝에 최운열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그가 제시한 통계 자료를 보고 입법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와 함께 관련 상임위원회 수석전문위원을 찾아가는 등의 방법을 동원했다. 최 전 의원과 이 전 차관, 협회 회원들의 노력을 통해 마침내 해당 법은 2020년 1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법이 통과시키려면 전략이 중요하더라고요. 최 전 의원뿐 아니라 다양한 관계자들의 도움을 얻었던 게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여성이사협회 한국지부는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지난 6월 국제기업지배구조네트워크(ICGN) 연례 회의에서 지배구조 부문 대상을 받기도 했다. ICGN은 1995년 미국과 유럽 등 글로벌 기관 투자자들이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설립한 기관이다. 해마다 기업지배구조개선에 기여한 개인·기관에 상을 주고 있다. 기업지배구조 관련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꼽힌다. “주최 측으로부터 정부도 아니고 NGO가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말을 들었어요. 우리들이 힘을 합친 결과죠.”
‘여성 사외이사’ 턱없이 부족
세계여성이사협회 한국지부 창립멤버로 시작해 이사직을 거쳐 지난 5년간 회장직을 맡았던 이 전 차관은 지난해 롯데카드 사외이사에 임명돼 또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는 롯데카드 이사회 내 ESG위원회 위원장과 국가경영연구원 부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전 차관은 은퇴 후에도 활발하게 여성들의 발전을 위해 힘쓸 수 있었던 배경으로 ‘연대’를 꼽았다. “공직 생활을 할 때도, 공직을 떠나고 나서도 저한테는 여성들의 네트워크가 발동했어요. 퇴직하고 나서도 계속 일을 할 수 있게 한 동력이죠.”
이 전 차관은 ‘대한민국에서 여성들이 더이상 차별받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많이 발전했지만, 아직도 힘들다”라고 답했다. 자본시장법 개정안 통과 이후 여성 사외이사 비율은 꾸준히 상승했지만, 아직 국내 100대 기업 사외이사 여성 비율은 8%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제 주변에 있는 남성 리더들이 ‘이제는 신입 직원 중에 여성이 절반이다’라는 말을 많이 해요. 하지만 (연차가 오르면) 경력 단절이 일어나기 때문에 고위직까지 간 여성이 많지 않아요.” 정책적으로도, 민간에서도 경력 단절을 예방할 수 있는 실질적인 노력이 더 필요하다고 그는 강조했다.
◆이복실 전 여성가족부 차관은…
이 전 차관은 서울시립대 도시행정학과를 졸업하고 1985년 제28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문교부 사무관으로 공직에 입문했다. 이후 2005년 여성가족부 보육정책국장, 2010년 여성가족부 대변인을 거쳐 2013년 3월부터 2014년 7월까지 여성가족부 차관을 역임했다. 공직 은퇴 후 2019년부터 2023년까지 세계여성이사협회 한국지부 회장으로 활동한 후 현재는 롯데카드 사외이사와 국가경영연구원 부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박준이 기자 giv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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