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거부권 정국’이다. 정부여당이 강력히 반대한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법 개정안)’과 ‘방송3법(방송법·방송문화진흥회법·한국교육방송공사법 개정안)’이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의 밀어붙이기로 국회를 통과하면서, 윤석열 대통령의 법률안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가 점쳐진다.
경기 김포시의 서울 편입을 골자로 한 메가시티 구상과 공매도 금지 카드 등 잇따라 정국 주도권을 잃었던 민주당은 쟁점 법안에 대한 세 과시로 국면 전환을 시도하는 한편, 지지층인 노동계 표심을 공략하는 모습이다. 윤 대통령은 양곡법과 간호법에 이어 4개 법안에 대해서도 무더기 거부권을 행사할 예정이어서, 지난달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 이후 자세를 낮췄던 여권은 정치적 부담이 커졌다. 다만 ‘거부권 정국’이 가져올 민심의 파장은 아직 예측하기 어렵다. 분명한 점은 내년 총선을 5개월 앞두고 여야 간 주도권 싸움이 한층 격렬해지면서 정국 경색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노란봉투법 처리 막전막후…여야, 고도의 정치싸움 = 10일 정치권에 따르면 전날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노란봉투법과 방송3법은 민주당이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과 이정섭 수원지검 2차장검사, 손준성 대구고검 차장검사 등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당론으로 발의해 본회의에 보고하면서 일사천리로 처리됐다.
당초 국민의힘은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위한 무제한 토론)로 이들 법안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따져 국민에게 알린다는 방침이었지만, 필리버스터로 인해 닷새간 본회의가 열리면 이 위원장에 대한 탄핵안 가결이 불가피한 만큼 본회의를 보이콧한 것이다. 국회법에 따라 탄핵안은 본회의 보고 24시간 이후 72시간 이내 표결하지 않으면 자동 폐기된다. 본회의가 열리는 것을 막기 위해 노란봉투법의 부당성을 알리는 것을 포기한 셈이다.
집권여당의 이 같은 전략은 대통령 거부권을 염두에 둔 것이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국회는 재표결 과정을 거치는데, 200명 이상이 찬성해야 가결된다. 현재 111석인 국민의힘 의석수와 보수 성향 무소속 의원까지 합칠 경우 노란봉투법이 실제 시행될 가능성은 낮다.
◆윤 대통령, 거부권 만지작 =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논의는 시기상조라면서도 이들 개정안의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입장이 분명하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논의하거나 언급할 상황은 아니다”라면서도 “하지만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국민들의 혼란을 부추길 사안들에 대해서는 당과 부처의 고민이 먼저 이뤄질 것”이라고 언급했다.
대통령실은 앞서 거부권을 행사했던 양곡관리법 개정안, 간호법 제정안과 같이 국회에서 여야의 합의를 거치지 않은 법안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특히 노란봉투법의 경우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파업을 조장하고 산업 현장에 혼란을 가져올 소지가 클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대통령의 계속되는 거부권 행사’를 부각시키기 위한 민주당의 의도가 분명한 만큼 섣불리 입장을 밝히지는 않고 있다. 이 같은 판단에는 최근 윤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 상승세도 반영됐다. 강서구청장 선거 패배 후 하락세를 보이던 지지율이 연이은 민생 현장 방문으로 회복세를 넘어 상승 분위기를 탄 만큼 ‘거부권 행사’로 인해 일방적으로 국정을 운영하는 모습을 반영시킬 필요가 없어서다.
◆”망국적 악법” vs “거부권 행사하면 국민이 尹 거부” = 민주당도 윤 대통령의 거부권을 정조준했다. 홍익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할 명분도 이유도 없다”면서 “이 법들이 통과되면 큰일이 날 것처럼 호들갑을 떤 여당도 필리버스터를 철회했기 때문”이라고 직격했다. 홍 원내대표는 “대통령이 그동안 한 일이 너무 없어 습관성 거부권 행사라도 업적으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라면, 국회의 입법권을 존중해 법을 공포해야 한다”며 “농민을 거부하고, 간호사도 거부한 데 이어 이제는 대다수의 일하는 국민과 민주주의까지 거부한다면 국민들이 윤석열 대통령을 거부하게 될 것”이라고 공세를 이어갔다.
반면, 국민의힘은 노란봉투법이 시행될 경우 경제적 부작용을 강조하며 대통령 거부권의 불가피성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노조관계법 2·3조 개정안은 우리 경제의 추락을 불러올 망국적 악법”이라며 “소수당이 다수당에 대항할 수 있도록 법률에서 보장한 유일한 수단인 필리버스터를 포기한 것은 정쟁에 눈이 먼 민주당이 탄핵소추권을 악용해 혼란을 초래하고 국가업무를 마비시키는 것을 묵과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재명 민주당 대표 수사팀을 이끌고 있는 이정섭 검사에 대한 탄핵 시도 역시 명백한 방탄 탄핵이며 보복 압박이고, 노골적 사법 압박행위”라고 비판했다.
한편, 민주당은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이정섭 수원지검 2차장검사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에 고발하기로 의결했다. 이 차장검사는 현재 수원지검 특별수사팀을 이끌어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 관련한 수사를 총괄하고 있으며, 2019년 8월 서울동부지검에서 근무할 당시 ‘청와대 감찰 무마 사건’을 맡아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등을 기소한 바 있다.
배경환 기자 khbae@asiae.co.kr
장희준 기자 junh@asiae.co.kr
김영원 기자 forev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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