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의 극명한 대결 구현해낸 황정민·정우성 연기 돋보여
(서울=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암살로 유신 체제가 막을 내리면서 그동안 억눌려 있던 민주화 요구가 쏟아져 나왔다.
그해 12월 6일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대통령에 선출됐지만, 권력의 무게중심은 여전히 군부에 있어 정국의 향방을 가늠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도 안 돼 발생한 12·12 군사 반란은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군내 정치 사조직 하나회가 무력을 동원해 불법적으로 군의 지휘권을 장악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신군부 집권의 길이 열렸고,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은 다시 한번 좌절됐다.
군사 반란 세력은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비롯한 군 지도부를 체포하고, 서울 시내에 병력을 투입해 육군본부, 국방부, 언론사, 주요 도로 등을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무력 충돌도 발생했다.
당시 열아홉 살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김성수 감독은 한남동 집에서 밤하늘에 울리는 총성을 들었고,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았다.
그로부터 44년이 지나 김 감독이 12·12 군사 반란의 긴박했던 9시간을 그린 영화를 내놨다. 그의 신작 ‘서울의 봄’이다.
이 영화는 12·12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모델로 한 전두광(황정민 분)과 진압군을 지휘했던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을 모델로 한 이태신(정우성)을 두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기본적인 설정에선 12·12 군사 반란이라는 실화를 토대로 했지만, 핵심 인물의 이름을 바꾼 데서 보듯 구체적인 캐릭터와 이야기는 과감하게 창작했다. 관객이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영화적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다.
실제로 12·12 당시 진압군은 제대로 된 저항을 못 했지만, 이 영화에서 이태신은 전두광을 궁지에 몰아넣을 만큼 효과적인 작전을 펼치며 긴장 수위를 한껏 끌어올린다. 무력 충돌의 규모도 그만큼 크다.
영화는 박 대통령 암살 사건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보안사령관 전두광은 암살 사건 수사를 지휘하는 합동수사본부장에 임명돼 막강한 권한을 쥐게 된다.
전두광의 권력욕에서 위험을 감지한 계엄사령관 정상호(이성민)는 투철한 군인 정신을 가진 이태신에게 수도경비사령부를 맡겨 전두광을 견제하려고 한다.
연말 인사에서 좌천될 위기에 몰린 전두광은 정상호를 끌어내리기로 결심한다. 그는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핵심 멤버들을 자기 집으로 불러들여 정상호를 박 대통령 암살 사건에 엮어 체포하고 무력을 동원해 군을 장악할 음모를 꾸민다.
전두광은 하나회 멤버인 9사단장 노태건(박해준)의 도움을 받아 전방 부대까지 서울로 끌어들이고,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이 강력한 저항에 나서면서 서울 시내에서 대규모 무력 충돌이 벌어질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닫는다.
이 영화의 재미는 전두광과 이태신이라는 두 캐릭터를 보는 데서 나온다.
전두광 역의 황정민은 자아도취에 빠져 끝없이 욕망을 추구하는 위험한 인물을 스크린에 완벽하게 그려낸다. 화장실이라는 사적인 공간에서 전두광이 자기 내면을 그대로 드러내는 장면은 관객의 기억에 남을 만하다.
정우성의 연기도 돋보인다. 카메라가 여러 차례 클로즈업으로 비추는 정우성의 얼굴은 탐욕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분투하다가 쓰러지는 원리 원칙의 상징으로 각인될 것만 같다.
‘아수라'(2016)에서 악당들의 이전투구로 한국 사회의 현실을 보여준 김 감독은 이 영화에선 선과 악의 극명한 대결로 한국 사회를 조명하는 듯하다.
12·12 군사 반란의 역사적 사실이나 군의 복잡한 지휘 체계를 잘 모르는 관객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장면 하나하나가 사실적이어서 관객은 군사 반란의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에 빠져든다. 제작진은 당시 군의 복장과 장비 등을 고증하는 데 공을 들였다고 한다.
이 영화는 명시적으로 5·18 민주화운동을 거론하진 않지만, 관객은 12·12 군사 반란 6개월 뒤에 벌어진 광주의 비극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그러면서 영화 속 인간군상을 보다 보면, 권한과 책임을 가진 사람이 역사의 결정적인 국면에서 비겁하거나 안일한 선택을 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게 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군사 반란 세력에 맞선 사람들은 힘이 없었고 패배했지만, 그들의 저항은 의미가 있다는 게 김 감독의 설명이다.
그는 9일 ‘서울의 봄’ 시사회에서 “그들(진압군)이 맞섰기 때문에 그들(반란군)의 내란죄와 반란죄가 입증된 것”이라며 “아무도 맞서지 않았다면 역사에서 그들(반란군)이 승리자로 영원히 기록됐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12·12 군사반란을 그린 TV 드라마는 있지만, 이 사건을 영화화한 건 ‘서울의 봄’이 처음이다.
박 대통령 암살 사건을 소재로 한 ‘남산의 부장들'(2020)의 하이브미디어코프가 이 영화의 제작사다. 김 감독은 2019년 제작사로부터 시나리오를 받고 고민 끝에 연출을 맡기로 했다고 한다.
22일 개봉. 141분. 12세 관람가.
ljglor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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