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가·고금리가 촉발한 국내 소비 부진이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3분기 실적 집계 결과 국내 주요 백화점 3사(롯데·신세계·현대) 매출이 일제히 감소(전년 동기 대비)했고, 코로나19 대유행 기간에도 선방한 편의점업계의 성장세가 둔화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일본을 비롯한 해외 여행객이 급증해 국내 소비 회복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9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신세계백화점의 올 3분기 매출(별도 기준)은 6043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0.9% 줄었다. 신세계백화점 매출이 감소한 것은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 3분기 이후 3년 만이다.
롯데백화점의 3분기 매출도 전년 동기보다 2% 줄어 두 분기 연속 감소했다. 편의점 CU와 GS25를 운영하는 BGF리테일과 GS리테일의 매출 증가세도 올해 들어 한풀 꺾였다. 한 백화점 관계자는 “무엇보다 고물가·고금리로 소비가 위축된 여파가 크다”고 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소비 동향을 보여주는 소매판매액지수는 하반기 들어 매달 감소세(전년 동기 대비)를 보이고 있다.
내수가 얼어붙은 와중에 일본 등 해외를 찾는 여행객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일본 관광청에 따르면 올 1~3분기 일본을 찾은 한국인 관광객은 489만4806명에 달했다. 이는 이 기간 전체 외국인 관광객(1737만4300명)의 28.1%에 달하는 수치다.
여행업계는 올해 일본을 찾는 한국 관광객이 코로나 사태 전인 2018년 이후 처음으로 60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보고 있다. 올 상반기 국내 거주자의 국외 소비 지출(내국인이 해외에서 쓴 돈)은 12조3560억원으로 작년 상반기보다 85% 이상 급증했다.
국내 숙박·교통요금 급등하자…”그 돈이면 차라리 일본 간다”
국내 경기 부진이 갈수록 심화하는 가운데 우리 국민의 해외 소비는 급증하는 추세다. 역대급 엔저에 따라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여행 수요가 폭발한 게 핵심 요인이다. 국내 여행 인프라 개선 등을 통해 해외로 나가는 관광객의 발길을 붙잡지 못하면 소비 회복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9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국내 거주자의 국외 소비 지출’은 전년 동기(6조6605억원)보다 두 배 가까이 급증한 12조3560억원에 달했다. 이 항목은 가계가 해외에서 의식주 및 교통수단 이용 요금으로 쓴 비용이다.
2019년 상반기 이후 최대 규모로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 기간에 정부가 얼어붙은 소비 심리를 되살리기 위해 전 국민을 대상으로 지급한 1차 긴급재난지원금 규모(2020년 5~8월·14조2000억원)와 맞먹는 금액이다.
이 가운데 상당 금액은 일본에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관광국에 따르면 올해 1~9월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은 489만4800명이었다. 이 기간 일본을 방문한 전체 외국인(1737만4300명)의 28.2%를 차지해 압도적 1위였다. 7~9월 한국인 관광객은 일본에서 1인당 평균 11만686엔(약 96만원), 총 1955억엔(1조7000억원)을 쓴 것으로 집계됐다.
최근의 일본 여행 폭증세는 국내 여행업계도 깜짝 놀랄 정도다. 여행사들은 도쿄, 오사카, 후쿠오카, 삿포로 등 주요 관광지가 포화상태여서 지방을 중심으로 신규 여행지를 발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아 난처함을 호소하는 실정이다. 하나투어는 올해 동계시즌에 시즈오카, 다카마쓰, 마쓰야마, 가고시마 등 일본 소도시 상품을 확대 운영할 예정이다. 교원투어는 일본 여행상품 담당 부서에 업무량이 몰리는 점을 고려해 전담 인력을 추가 채용하고 있다.
엔저로 일본 여행 경비 부담이 줄어든 가운데 물가 급등으로 국내 여행 경비 부담은 커졌다. 제주 여행 비용이면 일본의 이국적 풍광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데 굳이 한국에 머물 이유가 없다는 게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의 대체적 인식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여름휴가 성수기인 지난 8월 국내 콘도 이용료와 호텔 숙박료는 전년 동월 대비 각각 8.5%, 6.9% 올랐다. 택시비(19.1%), 시외버스 요금(10.2%), 시내버스 요금(8.1%) 등 교통비도 크게 불어났다.
더욱 뼈아픈 건 정부가 내수 활성화를 위해 임시 공휴일 지정이란 ‘극약 처방’을 했는데도 효과가 잘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KB국민카드에 따르면 올해 추석 황금연휴 기간(9월 28일~10월 9일) 해외 결제 금액은 전주 같은 기간 대비 8.3% 증가했다.
반면 국내 소비 금액은 3.0% 늘어나는 데 그쳤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현재의 원·엔 환율은 소비자가 일본 재화와 서비스를 구매하는 데 매우 매력적”이라며 “상당히 이례적인 상황이기 때문에 소비자의 행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해외 여행객의 일부만 국내로 돌려도 소비 파급 효과가 클 것이란 견해가 나온다. 현대경제연구원은 4월 정부가 119만 명의 국민에게 여행비를 지원하면 연간 6조500억원의 소비 진작 효과를 낼 것이란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여행업계에선 최근 성인 한 명이 일본에서 100만~150만원을 지출하는 것을 감안할 때 올해 일본으로 떠난 한국인의 절반만 국내로 돌렸어도 3조원이 넘는 소비 진작 효과가 있었을 것으로 추산했다.
하헌형/이미경 기자 hhh@hankyung.com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