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설치 미술가이자 대지예술가 제임스 터렐. 미국을 넘어 세계 곳곳의 풍경을 바꿔놓고 있는 그는 10년 넘게 국내 미술계의 ‘러브콜’에 침묵했다. 부인이 한국계인 데다 함석헌 선생과도 인연이 깊은 것으로 알려졌을 만큼 한국에 애정이 깊었지만, 한국행을 주저하고 있었다. 물리적인 나이가 장시간 비행을 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1943년생으로 올해 80세다.
한국 미술계의 내로라하는 ‘큰손’들의 초청을 뿌리친 제임스 터렐이 얼마 전 방한했다. 그를 불러들인 건 전남 신안군 자은도다. 터렐은 지난달 20일 자은도에서 개막한 2023 대한민국 문화의 달 행사의 ‘아티스트 토크’에 모습을 드러냈다. ‘빛의 마법사’로 불리는 터렐은 자은도를 비롯해 신안의 섬 곳곳을 둘러보고 작품을 설치하기로 했다.
총면적 52.7㎢로 울릉도(72.8㎢)보다 약간 작은 자은도는 해안선 길이만 57㎞에 달할 정도로 해변 경치가 뛰어난 섬이다. 백길, 분계, 둔장, 외기, 양산, 면전, 내치, 신성, 신돌 등 이름난 해변이 수두룩하다. 해변 어디에 서든 올망졸망 무인도를 배경 삼아 일출을 보거나 지는 해를 바라보면 세상 근심이 사라진다.
경치도 좋지만, 해변 토질이 다른 지방과는 확연히 다르다. 조수간만의 차가 뚜렷한 서남권 바다인지라 물 빠진 백사장은 자동차로 달릴 수 있을 만큼 단단하다. 1004 뮤지엄파크가 있는 분계해변에 가면 아침나절 잘생긴 준마를 타고 해변을 달리는 이들을 만날 수 있다. 그렇기에 자은도 해변은 어디에 견줘도 손색없는 최고의 낭만 산책로다.
제임스 터렐 이전에 자은도로부터 영감을 얻는 또 다른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있었다. 2019년 자은도에 ‘무한의 다리’를 설치한 마리아 보타다. 러시아 태생의 스위스 건축가인 보타는 리움미술관, 남양 성모마리아 대성당을 설계했다. 그가 조각가 박은선과 함께 자은도 본섬과 두 개의 무인도를 잇는 다리를 놓으면서 ‘인피니티(무한)’라는 이름을 붙였다.
방문객이 드문 평일의 가을날 다리 위를 걸으면 시간의 개념을 잊은 듯한 착각에 빠진다. 바다가 속살을 드러낸 썰물 때 갯벌을 보면서 걷는 맛도 일품이지만, 바닷물이 가득 찬 다리 위에 있으면 마치 무한의 바닷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다. 보타는 2024년 자은도에 ‘물 위의 미술관’을 콘셉트로 인피니티 뮤지엄을 지을 예정이다.
세계적인 거장을 유혹하는 자은도의 매력은 무엇일까. 그들의 웅숭깊은 예술혼을 모두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짐작건대 백지(白地)의 마력이 예술가를 불러들이는 게 아닐까 싶다. 바람이 몹시 세찬 어느 날 자은도 해변을 바라보며 옷깃을 여밀 때, 혹은 붉은 낙조에 물들어가는 백사장에서 상념에 빠지다 보면 범인(凡人)이라도 마음속 깊은 곳의 연필을 꺼내 무엇이든 그려보고 싶어진다.
신안군은 예술가를 끌어들이는 자은도의 마력을 세상에 더 알리기 위해 지난달 20~22일 또 하나의 기가 막힌 이벤트를 진행했다. 104개의 피아노를 자은도 해변 곳곳에 두고 온 섬을 무대로 창작 피아노 연주를 들을 수 있도록 했다. 올해 처음 시작한 자은도 피아노 축제는 박우량 신안군수와 강형기 신안예술총감독이 기획하고, 임동창 예술감독이 연출한 그 자체로 거대한 설치 미술이다.
피아노 축제에 참여한 아티스트의 면면도 화려하다. 한국예술종합대학에 재학 중인 수십 명의 피아노 전공자를 비롯해 대금 명인 이생강, 판소리 명창 왕기철·왕기석·이영태 등 내로라하는 이들이 떼창을 선보였다. 임동창 피아니스트가 아니라면 이만한 예인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은도는 사랑스럽고 은혜롭다는 의미의 섬. 이름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온 장수 두사충의 일화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두사충이 명 말기에 반역으로 몰려 자은도로 피신했는데 이곳 주민들이 따뜻하게 대해줘 후일 그가 자은도로 불렀다는 것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전에도 섬 이름은 자은도였다는 사실이 문헌에서 확인되고 있다고 하니, 아마도 임란 이후 명 장수의 행적을 과장하던 때의 구전이 그대로 굳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2021년 행정안전부가 선정한 ‘2021년 가고 싶은 33섬’에 선정될 정도로 풍경이 빼어난 데다 목포역에서 자동차로 1시간이면 닿을 수 있어 교통도 편리한 편이다. 씨월드리조트, 라마다호텔 등 가족과 함께할 만한 깔끔한 숙박 시설도 갖추고 있다.
자은도의 또 다른 볼거리는 해송 숲이 우거진 양산 해변 50만㎡에 조성된 해양 복합문화 관광단지다. 뮤지엄파크를 비롯해 수석미술관, 수석 정원, 세계조개박물관, 신안자생식물연구원, 오토캠핑장, 자연휴양림 등이 모여 있다.
수석미술관은 규모는 물론 수집품의 품위를 따져봐도 단연 국내 최고다. 목포 출신인 양수칠 선생이 평생 모아 신안군에 기증한 것을 토대로 약 260점의 수석(壽石)을 전시하고 있다. 산수경석, 물형석, 문양석, 추상석 등 진귀한 수석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흥미롭다.
신안군 향토문화해설사로 활약하고 있는 권성옥 씨의 수석에 대한 설명이 걸작이다. “자연이 억겁의 시간 동안 빚어낸 걸작 앞에 서면 모두 겸손해진답니다. 돌 앞에서 나이 자랑하면 안 되는 법이죠. 그래서 일본이 물 수(水)를 쓰는 데 비해 우리는 목숨 수(壽)를 돌 앞에 쓰는 건가 봅니다.”
자은도에서 하룻밤 정도 묵는다면 섬 동쪽에 우뚝 솟아 있는 두봉산 트레킹도 도전해볼 만하다. 자은초교에서 시작해 성제봉을 거쳐 정상에 올라 유천리로 내려오는 총거리 4.8㎞의 길은 산행길이 잘 조성돼 있고,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코스다. 좀 더 역동적인 산행을 원하면 도명사에 주차하고, 바로 두봉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을 추천한다. 해발 364m에 불과하지만 사납기가 육지의 유명한 악산(嶽山) 못지않다. 여담 하나. 자은도의 특산물은 대파다. 그런데 그 유래가 흥미롭다. 낙동강 하구에 있는 부산 명지도에서 대파밭을 일구던 대농들이 명지를 잇는 대파 산지를 찾던 끝에 다다른 곳이 자은도라는 것이다. 그들이 처음 점찍은 곳은 신안군의 임자도였고, 그곳에서 큰 성공을 거두자 이번엔 자은도를 두 번째 산지로 키웠다고 한다.
신안=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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