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만 환자의 삶을 바꾸는 ‘라이프 체인저(life changer)’가 나왔다. 미국 제약사 일라이릴리가 개발한 비만약 ‘젭바운드’가 미국에서 시판 허가를 받으면서다. 지난해 당뇨약으로 허가받은 ‘마운자로’와 같은 성분이다. 의료계에선 기존 위밴드 수술 수준의 감량 효과를 보이는 이 약이 비만 치료 패러다임을 바꿀 것으로 내다봤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8일(현지시간) 일라이릴리에서 개발한 젭바운드를 새 비만 치료제로 승인했다. 당뇨약 마운자로와 같은 성분인 젭바운드 한 달 투여 약값은 1060달러(약 139만원)로 정해졌다. 일라이릴리는 약값을 최대 50%까지 낮추는 환자 지원 프로그램도 가동할 계획이다. 마운자로(1020달러)보다 비싸지만 경쟁약인 노보노디스크 비만약 위고비(1350달러)보다 20% 정도 저렴하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 의료시장 특성상 보험시장에서 경쟁해야 하는 당뇨약은 약가를 높게 정해야 리베이트 등을 줄 수 있어 고가 전략을 펴는 게 유리하다”며 “반면 비만약은 저렴한 약값이 무기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젭바운드 허가 전에도 같은 성분 약인 마운자로를 비만 용도로 활용하는 환자가 늘면서 이 치료제 수요는 급증했다. 올해 3분기 마운자로는 매출 14억달러를 기록했다. 노보노디스크가 선점한 미국 비만시장에서 젭바운드가 빠르게 시장 점유율을 확대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이런 기대가 반영되면서 이날 일라이릴리 주가는 전날 대비 3.2% 상승한 619.13달러로 마감했다.
젭바운드는 집에서 매주 한 번씩 5㎎, 10㎎, 15㎎ 등으로 나뉜 용량의 치료제를 투여하는 자가주사제다. 체질량지수(BMI·체중(㎏)을 키(m)의 제곱으로 나눈 값)가 30 이상이거나 BMI 27 이상이면서 고혈압 등 합병증이 있는 성인만 쓸 수 있도록 허가받았다. 몸속 인슐린 분비를 촉진해 포만감을 높이는 글루카곤유사펩타이드(GLP)-1 계열 치료제로 분류된다.
노보노디스크의 매일 맞는 비만 주사제 삭센다와 위고비는 GLP-1 수용체만 활성화한다. 반면 젭바운드는 GLP-1과 포도당 의존성 인슐린 분비 촉진 폴리펩타이드(GIP) 등 두 가지 표적에 약효를 낸다. 비만약으로 허가받은 첫 GLP-1 이중작용제다. 이 때문에 임상시험에서 기존 치료제보다 높은 체중 감량 효과를 보였다.
임상 3상 시험에서 평균 체중이 105㎏인 성인에게 젭바운드 15㎎을 72주간 투여했더니 체중이 최대 22.5%(23㎏) 빠졌다. 84주 투여 임상시험에선 체중이 평균 26.6%(29.2㎏) 줄었다. 위고비는 68주 투여 감량 효과가 15% 정도로 보고된다.
수술에 버금가는 체중 감량 효과를 낸 신약이 출시되면서 비만 치료 환경을 바꿀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비만 수술 중 하나인 위밴드 수술의 체중 감량 효과가 20% 정도로 평가된다. 감량 효과가 가장 큰 위우회술이 체중을 25%가량 줄여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뇨약인 마운자로는 국내에서도 시판 허가를 받았다. 의료계에선 내년께 국내에서도 당뇨환자 치료를 위해 마운자로를 쓸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다만 비만 치료용인 젭바운드는 국내 허가를 받지 않았다. 국내에선 이 성분 약을 활용해 심혈관 질환 안전성을 확인하는 장기 추적 임상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해당 임상시험에 참여하고 있는 조영민 서울대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는 “체중 감량 효과가 20%를 넘는 젭바운드가 허가를 받으면서 진정한 비만약 시대가 열렸다”며 “비만이 심각한 질환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게임 체인저가 아니라 라이프 체인저가 등장한 것”이라고 말했다.
비만약 수요는 꾸준히 늘어날 전망이다. 모건스탠리는 지난해 24억달러였던 세계 비만시장 규모가 2030년 77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공급을 늘리는 게 숙제다. 일라이릴리는 GLP-1 계열 치료제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노스캐롤라이나와 인디애나에 있는 생산시설을 확충하고 있다. 1년 전보다 생산량을 두 배로 늘리기 위해 20억달러를 투입했다.
이지현/신정은 기자 blues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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