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use it’s there(거기 있으니까).”
에베레스트를 최초로 등정한 영국 산악인 조지 맬러리(1886~1924)의 말이다. 그는 1921년과 1922년 에베레스트 등반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뉴욕타임스 기자가 이듬해 “왜 산에 오르느냐”고 물은 데 대한 그의 답이었다.
이 짧은 답은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등반가들에게 명문으로 남아 있다. 더 높은 곳을 향해 기어이 오르는, 때론 목숨을 걸고 등정하는 사람들에겐 사실 우리가 기대하는 그리 거창한 이유는 없다. 그저 산이 있으니까 산에 갈 뿐이다. 하지만 올라본 사람은 안다. 산 정상에 올라야만 볼 수 있는 웅장한 풍경, 그 과정에서 느끼는 혼자만의 승리감과 자신감, 무엇보다 땅에서 솟아오른 수천 년의 역사와 두 발로 호흡하는 감정까지.
산은 단지 자연의 산물만은 아니다. 문화의 산물이기도 하다. 유럽에선 18세기까지 악마가 머무는 곳으로 통했고, 목숨을 건 등반가들은 정신이상자로 분류되기도 했다. 19세기 중반에야 비로소 숭배의 대상이 됐다. 1900년대 케이블카와 증기기관차의 발명은 산을 우리 곁에 더 가까이 가져다 뒀다.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유럽 내륙지역 사람들은 산 중턱, 때론 정상까지 순식간에 오르내리는 인프라를 구축해 곳곳에 마을을 꾸리고, 터전을 마련했다. 그런 인프라들이 꾸준히 발전해 지금은 세계 누구나 쉽게 산을 찾아가게 만드는 관광 자원이 됐다. 기를 쓰고 오르지 않아도, 변하는 사계절을 느낄 수 있는 그런 보물 말이다.
얼마 전 걷기와 등산을 평생 즐겨온 박병원 안민정책포럼 이사장으로부터 “알프스에 다녀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케이블카와 열차, 렌터카가 있으니 힘들이지 않고 해발 500~2000m의 절경을 온전히 느끼며 느릿느릿 걸을 수 있는 14일간의 여정이었다고. 이번 웨이브는 스위스에서 출발해 오스트리아까지 ‘거기에 (열차와 케이블카가) 있어서 그저 올랐던’ 박 이사장의 산악 여행기다.
박병원 이사장의 15일 알프스 대장정
슈탄저호른, 창 없는 2층 케이블카 운행
내려서 50m만 걸어 올라가면 정상 도착
발밑에 보이는 루체른 호수·설경 일품
알프스라고 하면 사람들은 몽블랑(4809m), 마터호른(4478m), 융프라우(4158m)를 떠올린다. 이런 산들은 보는 산이지 걷는 산이 아니다. 그래도 일망무제의 초원을 걸으면서 높은 곳에 오르지 않으면 누릴 수 없는 경관과 공기를 포기할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산악관광 인프라가 가장 잘 돼 있는 유럽의 알프스를 찾을 수밖에 없다.
스위스, 독일, 오스트리아의 알프스는 덜 가 본 편이라 지난여름 스위스 루체른에서 인스브루크, 잘츠부르크까지 14일간 돌아봤다.
국토의 70%가 산이고 국민 다수가 등산과 걷기를 너무 좋아하는데, 산악관광 인프라는 거의 제로인 나라가 한국이다. 이번 여행은 티롤의 산악관광 인프라 취재기이기도 하다.
(1) 루체른-필라투스-리기-슈탄저호른
시작은 루체른이었다. 시내버스를 타고 크리엔스까지 가서 조롱조롱 매달린 6인승 작은 케이블카를 타고 프랑크뮌테그(1416m)에 내린다. 잠시 숨을 고른 뒤 버스만한 케이블카를 갈아 타면 필라투스쿨름(2132m)에 다다른다. 이곳엔 호텔과 식당이 완비돼 있고, 등산로도 뻗어 있다. 별로 높지 않은 오베르하우프트, 에젤 등 두 봉우리를 오른 다음 ‘꽃 트레일(Blumenpfad)’이라 부르는 길을 곳을 두 시간 걸었는데 꽃 피는 계절이 아니어서 별 소득은 없었다. 이곳에는 아프트식 등반전철역이 붙어 있는데, 두 량의 열차가 동시에 오르내리면서 알프나흐슈타트(호숫가인데 346m이다)까지 운행한다. 여기서 루체른으로 돌아가려면 열차나 배를 타야 한다. 배를 한번 타 볼 것을 권한다. 특히 날씨가 좋을 때는.
루체른 호수와 알프스가 내려다보이는 파노라마의 리기 쿨름(1797m). 리기 반 주차장에서 등반열차를 타고 오르는 길엔 7개의 역이 있어 수시로 타고 내릴 수 있다. 소박한 식물원 ‘리기 슈타펠회어’에서 내려 한 바퀴를 돌아보고 온천이 유명한 리기칼트바트까지 걷고 거기서 잠시 쉰 다음 출발점인 비츠나우까지 걸어 내려왔다.
슈탄저호른(1898m)은 슈탄스 시내에서 나무로 만들어진 열차를 줄로 끌어당기는 푸니쿨라 방식의 등반열차로 켈티(714m)까지 올라가면 수십 명이 탈 수 있는 대형 케이블카로 갈아타는데, 중앙의 나선형 계단으로 지붕 위에 올라갈 수 있는 2층 케이블카다. 사진 찍는 데 엄청난 장애물인 유리창이 없는 케이블카의 장점을 절감할 수 있다. 케이블카 역에서 내려 50m만 올라가면 정상을 다녀올 수 있다.
만약 이곳에 안개가 자욱하다면 에케를리 등산주차장을 찾아가 볼 일이다. 작은 교회인 ‘홀츠방 채플’이 있는 곳까지 거의 평탄한 길을 걸으며 온갖 야생화를 즐길 수 있다.
(2) 에게베르게-클레벤알프-티틀리스-클라우젠패스
빌헬름 텔의 고장인 알트도르프에서 클라우젠패스를 지나 오스트리아 가는 계곡에는 할디, 루오기그, 비엘, 리치, 트리스텔, 시티스알프, 오베르알프 등 곳곳에 케이블카가 있다. 한마디로 마을마다 있는 셈이다. 이 루트 초입의 푸엘렌에서 에게베르게에 올랐다. 소박한 케이블카인데 1인 요금은 30스위스프랑. 위에는 마을이 하나 있는데, 여관급 게스트하우스엔 배낭여행객이 수두룩했다. 걷기 좋은 트레일이 여러 방향으로 뻗어있어 날씨만 허락한다면 하염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니트발덴 호숫가에 있는 베켄리트에서 클레벤알프로 올랐다. 오후 3시 이후엔 할인해 주는 곳이 많은데 내려오는 막차가 5시여서다. 완만한 경사의 길이라 걷기엔 좋았지만 비와 바람이 심해 능선에 올라갔을 땐 서 있기조차 어려웠다. 베켄리트엔 ‘성 하인리히 교회’가 있는데, 겉으로 보면 소박하지만 내부와 묘지는 나름 볼 만하다.
다음 여정은 눈과 얼음의 세계 ‘티틀리스’였다. 해발 3238m의 이 산은 ‘천사의 마을’이라 불리는 엥겔베르크에서 산 정상 바로 아래 전망대까지 등산철도와 케이블카로 연결된다. 기둥 사이에 3개씩 대롱대롱 매달린 6인승 작은 케이블카를 타고 트륍제(1800m)를 거쳐 슈탄트(2428m)에서 원형의 큰 케이블카로 갈아탄다. 이미 눈밭인 이곳에서 더 높은 클라인 티틀리스(3028m)로 가는 케이블카는 가는 동안 360도 회전해 모두 공평하게 전망을 즐길 수 있다. 얼음동굴을 지나 얼음절벽까지 약 100m를 올라가면 전망대인데, 한여름에도 그저 눈과 얼음뿐이다.
해발 1952m의 클라우젠패스는 케이블카나 등반열차 비용을 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는 최상의 등산로 입구다. 옛날에도 가 본 적이 있는데, 다시 올 정도로 매력적인 곳이다. 정상엔 호텔과 식당이 있고 주차장도 충분하고 시내버스로도 접근이 가능하다.
오스트리아 피츠탈 계곡 ‘빙하특급’ 타면
8분 만에 높이 1100m 통과해 땅으로 나와
케이블카 타면 광활한 만년설 풍경에 감탄
(3) 피츠탈계곡-노르트케테
오스트리아로 넘어왔다. 일단 모든 것이 싸다. 그만큼 행복해진다. 인스부르크 인근 피츠탈계곡 ‘빙하특급’으로 향한다. 미텔베르크역(1740m)에서 열차를 타면 높이 1100m를 8분 만에 주파해 상부 역(2840m)에서 지상으로 나온다. 지하철이다! 여기서 100여m를 걸어 케이블카를 타면 전망대와 카페가 있는 힌터러 부루넨코겔(3440m)에 올려다 준다. 스위스에서라면 간단히 10만원을 넘을 텐데 여기는 48유로다. 만년설의 한가운데라 함부로 걸을 수는 없지만 옛날에 왔을 때는 전문 가이드를 따라 빙하를 걸은 적이 있다.
인스부르크 노르트케테는 티롤 알프스의 백미다. 시내 한가운데 의회역에서 전철을 타면 지하, 지상, 다리를 거쳐 훙거베르크(857m)에 데려다준다. 레일 사이에 있는 두 줄의 강선으로 끌어당기는 푸니쿨라 방식인데, 2량의 열차가 커브길이 있는 1.8㎞를 8분에 달려서 훙거베르크에 올려다 준다.
여기서 제그루베(1905m)까지는 케이블카를 타고, 다시 하펠레카르(2257m)까진 또 다른 케이블카를 탄다. 걷는 길은 훙거베르크, 제그루베, 하펠레카르에서 뻗어나가니 어디에 내려서 트레킹 코스를 골라도 좋다. 인근엔 온천휴양지 바트이슐이 있다.
(4) 할슈타트-다흐슈타인 크립펜슈타인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마을’로 알려진 할슈타트. 유네스코 세계유산이기도 한 이곳은 인산인해다. 마을 안엔 주차가 불가능하고, 외곽의 주차장은 ‘소금광산’에서 가까운 순으로 찬다.
소금광산은 푸니쿨라를 타고 올라가 겉옷을 갈아입고 가이드를 따라 한 바퀴 도는데 약 세 시간이 걸린다. 길이 548m의 24인승 푸니쿨라로 왕복하는 것과 소금광산 관람을 합쳐 40유로를 받는다. 상부 역에 전망이 정말 좋은 식당이 있는데 소금광산에 들어가기 전에 예약해야 한다. 마음에 드는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면 예약해야 하는 것은 할슈타트 전체가 다 그렇다.
할슈타트 부근의 다흐슈타인-크립펜슈타인의 케이블카는 609m 지점의 하부역에서 중간역인 쇤베르크알름(1350m)을 지나 2150m까지 데려다준다. 상부 역의 ‘파이브 핑거즈’라 불리는 전망 데크와 세계유산 나선전망대에 가볼 수 있고, 얼음동굴을 들를 수도 있다. 산 넘어 반대쪽 갸이트알름으로 내려가는 케이블카도 있다. 중간역과 상부역 모두 식당이 있다. 숙박 산장도 있다. 어딜 가나 산 위에 식당과 숙박시설이 있는 것이 너무 부럽다.
(5) 샤프베르크-츠뵐퍼호른
잘츠부르크의 알프스의 대표 격인 샤프베르크(1783m). 1893년부터 증기기관차가 산 아래에서 정상까지 사람들을 안전하게 실어날랐다. ‘장크트 볼프강’ 호숫가에 있는 역에 아침 10시에 갔는데 오후 3시10분 출발 표를 팔 정도로 인기다. 시속 12㎞의 속도로 35분가량 지나면 정상에 오른다. 한쪽 면이 깎아지른 절벽 끝이라 걷기 좋은 길은 아니지만 날씨만 좋다면 50유로의 왕복 열차 요금이 아깝지 않다. 정상엔 호텔과 식당이 있다.
장크트 길겐에 있는 츠뵐퍼호른산은 해발 1552m인데 케이블카로 1471m까지 오를 수 있다. 1시간30분 정도에 원점으로 돌아올 수 있는 트레일을 비롯해 등산로가 뻗어 있다.
장크트 길겐에서 장크트 갈렌까지 가는 길엔 고사우 호수에 들러볼 만하다. 주차비 없이 180분까지 주차할 수 있다. 걷기 좋은 길이 많지만, 호수 둘레길만 걸어도 아름답다. 한 시간 남짓 걸리는데 동화 같은 마을과 옥빛 호수, 그 호수 위에서 보트를 탈 수도 있다.
(6) 산티스-에벤알프
다시 스위스로 국경을 넘어 산티스와 에벤알프로 향했다. 이 동스위스 지역의 숙박업소에 머물면 60개 관광지(케이블카 포함)를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오스카 카드를 살 수 있다(3일짜리가 45스위스프랑, 너무나 싸다).
장크트 갈렌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티스는 단일 이용 요금만도 56스위스프랑이라 가장 먼저 찾았다. 85인승 케이블카를 타고 2502m까지 오르는데, 가는 길은 경치가 기가 막히지만 정상은 너무 높아 황량한 바위밖에 없었다. 역시 2000m가 좋다.
이어서 찾은 곳은 에벤알프. 해발 1600m까지 케이블카가 6분 만에 사람들을 옮겨다 놓는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아래쪽으로 절벽 길과 동굴 길을 20분 정도 걸으면 ‘나의 버킷 리스트’에 있던 애셔 산장이 나온다.
‘절벽 레스토랑’으로 불리는 이곳은 BBC 등 여러 매체에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에 여러 차례 꼽혔다. 점심을 여기서 먹을 수 없다면 생맥주라도 한 잔 마셔야 한다.
김보라 기자/스위스·리히텐슈타인·오스트리아=박병원 안민정책포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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