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혼인신고라는 명시적인 방법에 의해 법적인 부부관계를 인정하는 ‘법률혼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혼인신고 없이 사실상 부부처럼 생활하는 경우도 주변에서 종종 볼 수 있는데요. 이를 ‘사실혼’이라고 합니다.
정식적 절차에 따른 혼인관계는 아니지만 우리나라는 사실혼을 동거·부양·협조·정조의 의무를 기반으로 하는 부부 관계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제한적이긴 하지만 실생활에서 사실혼 부부도 법률혼 부부와 거의 동등한 책임과 권리를 갖는데요.
혼인 관계를 정리할 때도 사실혼 부부 역시 법률혼 부부가 그러하듯 공동으로 노력해 취득한 재산에 대한 재산분할이나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실혼 부부가 그런 건 아닙니다.
민법
제812조(혼인의 성립) ①혼인은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에 정한 바에 의하여 신고함으로써 그 효력이 생긴다. <개정 2007. 5. 17.>
②전항의 신고는 당사자 쌍방과 성년자인 증인 2인의 연서한 서면으로 하여야 한다.
지난 2018년 A씨는 법원에 사실혼 관계 해소에 따른 재산분할 청구 소송을 냈습니다.
A씨와 B씨는 연인 사이였는데요. 교제한 지 2년 만인 2007년 두 사람은 기존에 B씨가 살던 빌라에서 동거에 들어갑니다. 이후로 약 11년간 A씨와 B씨는 함께 생활했습니다.
A씨에 따르면 두 사람은 비록 혼인신고는 하지 않았으나 11년간 사실상의 부부생활을 이어오며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두 사람은 오랜 동거 기간 동안 서로의 동생 부부와 아들의 결혼식, 고희연과 같은 가족 행사에 참여할 정도로 긴밀한 사이였습니다. B씨 동생의 아내가 A씨를 형님이라고 부르며 새해 안부 문자메시지를 전송할 정도로 가족 간 왕래도 잦았습니다.
하지만 11년의 동거 끝에 둘은 관계를 정리합니다. 이후 A씨는 곧바로 재산분할을 청구하는데요.
A씨는 사실혼 유지 기간 중 두 사람이 공동으로 기여해 형성한 재산이 있다며 재산분할에 따라 B씨로부터 7200만 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아울러 7200만원을 모두 지급할 때까지 연 5%의 이자도 청구하는데요.
A씨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재산분할 청구로 자신의 몫을 받겠다는 A씨의 주장은 정당해 보입니다. 앞서 말했듯 법률혼이 아닌 사실혼 관계였던 상대방에 대해서도 재산분할을 청구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법원은 이러한 A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법원은 A씨와 B씨가 사실혼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했습니다.
◇”사실혼 VS 단순 동거”…객관적 ‘증거’ 있어야
A씨의 재산분할 청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실혼과 단순 동거의 명확한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두 연인이 한 주거지에서 혼인신고 없이 사는 사실혼과 단순 동거는 겉보기에 별다를 게 없어 보이는데요. 둘은 엄연히 다른 개념입니다.
단순 동거는 말 그대로 두 사람이 단순히 함께 사는 것을 말합니다. 동거는 법적 보호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두 연인이 헤어져 따로 살게 된다 하더라도 각자 소유의 재산을 챙겨갈 수 있을 뿐 동거 기간 중 자신이 경제적으로 기여한 바를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이와 달리 사실혼은 법률혼과 거의 유사한 책임 및 권리를 부여받는 법적 보호 대상이기 때문에 관계가 해소될 경우 상대방에 재산분할이나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습니다.
법원은 A씨와 B씨의 관계가 사실혼이 아닌 연인 사이의 단순 동거에 해당하기 때문에 A씨의 재산분할 청구 소송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겁니다.
왜 법원은 두 사람의 사이가 단순 동거라고 봤을까요?
단순 동거와 달리 사실혼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요건이 반드시 만족돼야 합니다. 부부 당사자 간의 혼인 의사가 있어야 하며 객관적으로 봤을 때 사회관념상 두 사람을 부부라고 여길 만한 혼인 생활의 실체가 있어야 합니다.
이때 부부 당사자 간 혼인 의사와 공동 혼인생활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청첩장, 사진 등의 결혼식 자료 △양가 가족들과의 대화 △같이 사용한 생활비 통장 등 경제적 공동체를 형성해 생활했다는 사정 △주민등록상 동일한 주소지 △양가 경조사 참여 △자녀 등의 증거가 필요합니다.
만약 이러한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면 사실혼으로 인정되기가 어렵습니다. 법원이 A씨와 B씨의 관계를 사실혼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법원은 A씨 측이 제출한 증거들만으로 두 사람 사이에 혼인 의사 일치가 있었다거나 두 사람이 가족질서에 부합하는 부부 공동생활이나 혼인생활의 실체를 형성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또한 법원은 △A씨와 B씨가 결혼식을 올리지 않은 점 △전입신고를 하지 않은 점△둘 사이 금융거래 내역이 11년간 B씨가 A씨에게 25회 정도 송금한 것이 전부인 것으로 보아 둘 사이에 통상적인 금융거래가 없었다는 점 등을 들어 A씨의 재산분할 청구를 기각했습니다.
결국 오랜 기간 사실혼에 준하는 생활을 함께해왔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을 객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증거가 없다면 사실혼 관계가 인정될 수 없고 당연히 재산분할이나 위자료도 청구할 수 없는 겁니다.
◇사실혼 인정돼도 배우자 사망하면…
한편 사실혼 관계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재산분할 청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당사자 중 한명이 사망한 경우입니다.
실제로 지난 2006년 대법원은 “사실혼 관계에 있었던 당사자들이 생전에 사실혼 관계를 해소한 경우 재산분할청구권을 인정할 수 있으나 법률상 혼인관계가 일방 당사자의 사망으로 인하여 종료된 경우에는 생존 배우자에게 재산분할청구권이 인정되지 아니하고 단지 상속에 관한 법률 규정에 따라서 망인의 재산에 대한 상속권만이 인정된다는 점 등에 비추어 보면 사실혼 관계가 일방 당사자의 사망으로 인하여 종료된 경우에는 그 상대방에게 재산분할청구권이 인정된다고 할 수 없다”라는 판결을 내린 바 있습니다.
결국 사실혼 관계의 경우 상대방이 사망하면 남은 당사자는 국민연금이나 사망 보상금에 대한 권리만 주장할 수 있습니다. 사실혼은 법률혼과 달리 상속권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밖에도 기존 배우자와의 법적 혼인 관계가 해소되지 않은 중혼 사실혼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 사실혼의 경우 사실혼이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또한 사실혼이 인정된다 하더라도 관계 해소 시점으로부터 2년이 지나면 재산분할이나 위자료를 청구할 수 없습니다.
민법
제839조의2(재산분할청구권) ①협의상 이혼한 자의 일방은 다른 일방에 대하여 재산분할을 청구할 수 있다.
②제1항의 재산분할에 관하여 협의가 되지 아니하거나 협의할 수 없는 때에는 가정법원은 당사자의 청구에 의하여 당사자 쌍방의 협력으로 이룩한 재산의 액수 기타 사정을 참작하여 분할의 액수와 방법을 정한다.
③제1항의 재산분할청구권은 이혼한 날부터 2년을 경과한 때에는 소멸한다.
[본조신설 1990. 1. 13.]
글: 법률N미디어 인턴 이서현
감수: 법률N미디어 엄성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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