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현지시간) 애플의 신형 맥북 프로 공개 행사 후반부엔 맥북과 연결된 검은 기계 박스가 잠시 카메라에 잡힙니다. 당시 행사 발표자는 맥북의 M3 칩을 이용한 유전체 분석(DNA 시퀀싱) 속도에 관해 설명하던 참이었습니다.
이 검은 박스는 세계 최초의 휴대용 DNA 시퀀서 ‘옥스퍼드 나노포어’가 개발한 ‘P2 솔로’로, 등장한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으나, 언젠가 애플의 사업 영역을 생명 과학까지 확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기기입니다.
맥북 옆에 있던 검은 기계 정체는 휴대용 DNA 분석 기기
옥스퍼드 나노포어는 일반인에겐 다소 생소한 이름이지만, 생명 과학계에선 유명한 기업입니다. 이 회사는 2005년 옥스퍼드 대학교 출신 과학자들이 설립한 스핀아웃(Spinout·대학 연구소 기술을 이전받아 창업한 법인)이며, 휴대용 DNA 시퀀서를 개발·제조합니다.
현재까지 DNA 시퀀서 시장 1위는 미국 ‘일루미나’입니다. 하지만 기존 시퀀서들은 대형 기계인데다 가격도 매우 높아 본격적인 연구 기관이 아니면 구입하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반면 옥스퍼드 나노포어는 자체 개발한 ‘나노포어 시퀀싱’ 기술을 기반으로, 저렴하면서도 가벼운 시퀀서를 만들어냈다는 게 차별점입니다. 대신 일루미나보다 해독한 DNA의 정확도가 떨어진다는 한계가 있지만, 최근에는 정확도를 개선하면서 점차 대세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DNA 시퀀서, 차세대 생명 공학 핵심 키 쥐어
시퀀서는 미생물이나 동·식물, 혹은 인간 유전자 정보를 디지털 데이터로 ‘해독’하는 기기입니다. 지금껏 생물학과 유전공학은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일례로 인간의 희귀 질환을 일으키는 특정 유전체를 포착해 맞춤형 의약을 만드는 ‘정밀 의약’, 암 유전체를 분석해 암 종양만 타깃으로 삼는 ‘암 백신’ 등 차세대 생명 공학도 모두 시퀀서의 발전에 달린 일이지요.
국제 과학계는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변화무쌍한 변이 과정을 거의 실시간으로 추적해 변이 대응형 백신을 개발해 왔는데, 이 또한 나노포어를 포함한 시퀀서들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따라서 저렴하고 다루기 쉬운 나노포어 시퀀서는 앞으로 응용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기기입니다. 최근 옥스퍼드 나노포어는 앞으로 시퀀서가 적극적으로 활약할 가능성이 있는 시장 규모를 약 1500억달러로 추산하기도 했습니다.
‘M3’ 탑재한 맥북, 유전체 분석 업무에 제격
그렇다면 이런 시퀀서와 맥북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앞서 설명했다시피 시퀀서는 생물의 DNA를 데이터로 바꿀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데이터 자체는 단순한 유전자 염기서열을 나열한 텍스트 파일에 불과합니다. 이를 ‘분석’하려면 강력한 컴퓨팅 파워가 필요합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AI)이 발전하면서 대형 언어 모델(LLM)로 유전체 데이터를 분석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덕분에 애초 AI에 특화된 엔비디아의 GPU, 그리고 애플 맥북에 탑재된 M 시리즈 칩이 생물학 연구실에서 주목받고 있지요.
이번 행사에 공개된 P2 솔로 또한 맥북에 연결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DNA 샘플을 P2 솔로에 담아 해독하면, 완료된 데이터 파일이 맥북으로 옮겨져 M3 Pro 칩을 통해 2차 분석합니다. 이미 옥스퍼드 나노포어의 유전체 분석용 소프트웨어는 맥북 운영체제(맥OS) 맞춤형 버전으로도 개발됐습니다.
하드웨어서 서비스 기업 전환하는 애플
나노포어와 맥북의 협업 사례는 애플의 ‘생태계 전략’과도 궤를 같이합니다. 맥북은 애플 M 시리즈 칩의 높은 성능을 바탕으로 다양한 전문가용 소프트웨어를 맥OS로 끌어 들여왔습니다.
이번 애플 행사에서 공개됐듯이 고사양 컴퓨팅 파워를 필요로 하는 게임 개발, 정밀 기계 디자인, 3D 애니메이션 효과 툴이 대부분 맥북에서 구동됩니다.
사실 이런 전문가용 소프트웨어는 이미 아이폰만큼이나 애플에 매우 중요한 신성장동력입니다. 지난 3일 공개된 애플 4분기 실적을 보면 이런 추세는 매우 자명합니다.
올해 애플의 하드웨어(아이폰, 맥북) 성장세는 주춤했지만, 소프트웨어 서비스 매출은 계속 성장 중입니다. 특히 애플의 SaaS(서비스형 소프트웨어) 매출은 약 223억달러로 이미 아이폰 매출(672억달러)에 이어 그룹 2위입니다.
그런 점에서 애플은 앞으로도 ‘소비재 전자기기’ 회사에서 ‘서비스 기업’으로의 전환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이폰은 스마트폰 시장의 침체, 경쟁 과열 등으로 인해 난항을 빚고 있지만, 강력한 컴퓨터 칩과 OS를 기반으로 한 ‘애플 생태계’는 여전히 순조롭게 세력을 확장 중이기 때문입니다.
임주형 기자 skepped@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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